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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이야기

탕나더 싸쑹唐纳德 薩松, 도널드 서순의 중국식 표기, 그리고 아편전쟁의 데이비드 서순

 

 

<유럽 문화사> 출간을 반갑게 맞아주신 중국의 '메이데이' 님께서, 서순 집안 사람 가운데 아편전쟁의 원인제공자로서 중국사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이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세계(문화)사 공부가 되는, 짧은 글 개발괴발로 옮겨둡니다.

 

 


 

 

1. 아편상인, 데이비드 서순과 중국

 

 

1) 유대 상인 데이비드 서순, 아편전쟁을 부추기다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결과 난징(南京)조약이 체결되고 영국 정부가 홍콩을 할양받았다. 그런데 영국이 이 전쟁을 일으켜 지키고자 한 아편이, 유명한 서순 가문의 창업자 데이비드 서순(David Sassoon,大衛 沙遜, 다웨이 사쉰/1792~1864)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2) 서순, 가문을 일으키다

데이비드 서순은 1792년 바그다드의 부유하고 명망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른이 된 뒤 그곳 행정장관과 마찰을 빚은 서순은 가족을 이끌고 바그다드를 떠나 1832년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의 항구도시 뭄바이에 정착하고 돈을 써서 영국 국적을 얻었다. 당시 영국의 산업자본가들이 더 많은 무역권과 이윤을 얻기 위해 동인도회사의 독점적 지위에 한사코 반대를 하고, 항구도시 뭄바이가 식민지로서 동방의 아편(과 방직)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을 확인한 서순은 뭄바이에 ‘서순 회사’를 세웠다.

 

3) 서순의 아편, 중국을 중독시키다

과연 서순이 생각한 대로 사태가 전개되어, 영국 의회는 1833년 8월 동인도회사의 대중국 무역독점권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서순은 영국인이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 시장에 수출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어떤 이는 서순 가문이 이룬 성과를 묘사하면서 ‘황금이 마치 바람을 탄 구름처럼 동쪽을 향해 날아갔다’는 찬사를 늘어놓기도 했다. 서순은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두 아내에게서 얻은 여덟 아들을 아편무역을 담당하는 중요한 부서에 배치했다. 1830~1831년에 영국은 2만 상자에 가까운 아편을 중국에 팔아 수백만 달러(그 일부는 영국 여왕의 손에 들어갔다)의 이득을 얻었고, 1836년에는 그 규모가 3만 상자를 넘어섰으며, 중국 동남해안의 수많은 도시의 청장년과 군인이 서순 가문에서 생산한 아편에 중독되었다.

 

4) 아편전쟁: 영국의 승리, 아편의 승리, 서순의 승리

1838년, 청나라 정부는 임칙서(林則徐)를 파견하여 광둥(廣東)에서 아편무역을 금지시켰고, 1839년 영국의 아편 2만 상자가 불살라졌다. 심각한 손해에 직면하고 분노를 참지 못한 유대 상인 서순은 영국 상인들과 연합하여 영국 정부에게 중국 정부에 자신들의 복수를 해주고 손해배상을 받아내달라고 요구했다. 1840년 중국과 영국 사이에 마침내 아편전쟁이 터지고,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2. 중국 정부는 스페인 은화로 2100만 원을 영국에게 배상한다. 3. 광저우(廣州), 샤먼(夏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5개 해안도시를 개항한다.(……)

 

5) 백만장자 서순, 상하이를 사업의 거점으로 삼다

아편전쟁 후, 데이비드 서순의 아편무역은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서순 가문은 난징조약과 영국 정부가 부여한 특권을 등에 업고, 광저우와 홍콩과 상하이에 지점을 열었다. 특히 상하이에서의 발전이 두드러졌는데, 상하이는 후에 서순 가문의 대중국 업무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홍콩과 광주의 지위를 넘어서고, 서순 가문이 20세기 중반까지 발전하는 데에 견실한 토대가 되었다. 대중국 아편무역은 데이비드 서순을 물론 그의 ‘패밀리’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는데, 1854년 백만장자 서순은 영국령 인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6) 서순, 홍콩상하이은행을 설립하다

일찍이 아편과 방적무역 외에도, 서순 가문은 부를 축적하면서 사업 범위를 계속해서 확대해나갔다. 1864년 8월, 데이비드 서순은 여러 무역회사 대표들과 함께 홍콩상하이은행을 설립했다.

 

7) 서순의 죽음과 ‘전설’의 시작

1864년 11월 7일, 71세의 데이비드 서순은 인도에서 죽었지만, 서순 가문은 동아시아에서 비즈니스의 전설을 계속해서 써내려갔다.

 

 

 

2. 서순 가문, 중국 상하이의 ‘땅’을 지배한 영국 상인

 

 

1) 두 개의 ‘서순 양행’

서순 양행은 영국 국적의 유대인 일라이어스 데이비드 서순(Elias David Sassoon, 伊利亞斯 大衛 沙遜, 이리야쓰 다웨이 사쉰/1820~1880: 데이비드 서순의 둘째아들)이 1872년에 세운 회사였다. 서순 양행의 영어 표기 ‘E. D. Sassoon & Co.’는, 일라이어스의 형인 앨버트 압둘라 서순(Albert Abdullah Sassoon, 阿爾伯特 阿卜杜拉 沙遜, 아어바이터 아부두라 사쉰/1817~1896: 데이비드 서순의 큰아들)이 경영하는 서순 양행의 영어 표기와 같아 사람들은 중국에 세워진 순서대로 ‘신(新)’과 ‘노(老)’를 넣어 구별했다. 이 두 회사는 경영상으로나 자금상으로나 전혀 관계가 없었다.

 

2) 서순 가문과 아편무역

서순 가문은 건립 초기에 주로 아편과 방직무역에 종사했는데, 사업의 특성상 중국에 있는 자금은 모두 유동자본이었다. 서순 가문이 해마다 해외에서 판매하는 아편은 평균 5000상자에 이르렀고, 그 가치는 은화 300만 냥, 이윤은 100만 냥에 달했다.

 

3) 서순 가문, 아편에서 ‘부동산’으로

1877년 10월 13일, 일라이어스는 미국 상인 오거스틴 허드(Augustine Heard, 1785~1868)가 세운 경기양행(琼記洋行)이 파산한 틈을 타, 8만 냥을 들여 오늘날의 화평호텔和平飯店이 자리한 난징루南京路 외탄外灘 지역의 11.892무(畝, 1무=약200평)를 사들였다. 서순 가문은 런지루仁記路(오늘날 전츠루滇池路) 인근의 붉은색 담장의 서양식 3층건물만을 사용하고, 나머지 난징루 외탄 인근의 건물들은 모두 대여했다. 서순 가문이 부동산업에 손을 댄 첫 사업이었다. 10월 27일, 일라이어스의 아들 일라이어스 에드워드 서순(1853~1924)과 메이어 일라이어스 서순(1855~1924)이 9만 5000냥의 낮은 가격으로 톈퉁루(天潼路) 남쪽 지역과 허난베이루(河南北路) 동쪽 지역의 부동산 4곳을 사들였는데, 그 면적은 28.252무였다. 서순 가문은 그 후 19세기 말 마지막 10년 사이에 10여 곳의 부동산을 사들였다. 1880년대부터 시작해서 서순 가문은 난징둥루(南京東路)에서 부동산을 가장 많이 지닌 집안이 되었는데, 이 기록은 그 후로도 35년 동안 유지되었다. 1877~1900년에, 서순 가문은 29곳의 땅을 소유했고, 토지 면적은 364.999무에 달하여 상하이 부동산업계에서 제1의 지위를 차지했다. 서순 가문의 1921년 보고서와 당안(檔案) 자료에 따르면, 서순 가문은 1921년 29곳의 부동산을 보유했고, 투자 규모는 은화 209만 냥이었다. 이는 서순 가문이 2년 동안 아편무역으로 남긴 이윤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4) 부동산업자, 서순 가문: 업종의 변경

1880년 서순 가문을 세웠던 일라이어스 서순이 세상을 뜨고, 맏아들 제이컵 일라이어스 서순(Jacob Elias Sassoon, 雅各布 伊利亞斯沙遜, 야거부 이리야쓰 다웨이 사쉰/1843~1916)과 세 아들이 경영을 맡게 되었다. 1916년 제이컵 일라이어스가 세상을 뜨자 엘리스 빅터 서순(Elice Victor Sassoon, 埃利切 維克多 沙遜, 아이리치에 웨이커두어 사쉰/1881~1961)이 제3대 경영인이 되어 서순 가문의 실권을 행사했다. 한편, 중국인들 사이에서 금연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아편무역은 갈수록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빅터 서순은 경영방침에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여, 1920년 서순 가문을 유한회사로 개편하고 인도화폐 100만 루피를 자본금으로 책정했다. 서순 가문의 핵심 사업은 부동산업으로 바뀌었다. 서순 가문은 1926년 부동산전문경영업체(Cathay Land Co. Ltd)를 세우고, 본사는 자금 확보에 주력했다. 1928년 세워진 위안둥(遠東)투자회사(The Far Eastern Investment Co. Ltd)는 금융신탁 업무와 부동산투자 업무를 담당했다. 서순 가문이 보유한 많은 지역의 이름을 딴 부동산기업들이 세워졌는데, 상하이부동산투자금융기업(The Shanghai Estate & Finance Co. Ltd), 동방부동산기업(Eastrn Estate & Land Co. Ltd), 상하이부동산기업(Shanghai Properties Co. Ltd), 해밀턴신탁기업(The Hamilton Trust Co. Ltd), 쉬자휘(徐家匯)부동산기업(Zikawei Estate & Investment Co. Ltd) 등이 그들이다. 자회사가 늘어남에 따라 서순 가문은 관리를 위해서 1930년 신서순은행 상하이지점을 세우는데, 본사는 홍콩에 두어, 그룹의 자회사들의 자금계획을 책임지게 했다. 서순 가문은 사업을 총괄하는 위치에서 그룹의 모든 계획을 관리감독했다. 부동산업무가 늘어나자, 1932년 삼신(三新)부동산회사(San Sin Properties Co. Ltd)가 설립되었다. 빅터 서순은 독점적인 그룹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신탁조직 형식을 빌려 서순 가문과 신서순은행의 통제하에 부동산 관련 기업 10여 개를 세웠다. 이어 1912년 안리安利(Arnhold) 양행을 합병하고, 1928년 상하이에서 널리 알려진 알가愛爾德 양행(Albert Edmund Algar)을 사들였다. 1935년이 되면, 상하이신서순그룹은 직접 경영하거나 투자에 참여한 각종 기업 30여 곳을 거느리고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는 거대그룹으로 자리를 잡았다.

 

5) 서순 가문의 부동산 경영기법

서순 가문은 다양한 부동산 경영기법을 구사했는데, 가장 중요하게는 부동산업체를 대량으로 합병하고 고층건물을 세우는 방법으로 그룹의 독점적인 지위를 만들어갔다. 낮은 가격으로 구입하는 방법 외에도 주택담보대출 방식을 사용해서 소요비용을 줄였다. 서순 가문의 주택담보대출 조건은 대단히 혹독한 수준이었다. 담보가격은 대단히 낮은 수준으로 책정되었는데, 대개는 땅값의 30~40%에 불과했다. 서순 가문은 토지를 임대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건물을 짓게 하고 만기가 되면 땅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수법으로 많은 건물을 손에 넣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자료에 따르면 서순 가문은 1914년부터 1929년까지, 땅을 빌려 집을 짓고 만기가 되면 집을 소유하는 방법으로 모두 15개 곳을 임대했는데, 그 면적은 140.860무에 달했다고 한다.

 

6) ‘땅’에서 ‘건물’로: 서순 가문, 고층건물을 짓다

서순 가문은 1925년부터 고층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서순 빌딩이 시작이었다. 이 건물을 짓는 주요한 목적은 높은 임대수익을 얻는 데에 있었다. 빌딩이 세워진 후에, 그룹 내 캐세이부동산기업에게 세를 주고 건물에 대한 경영을 맡겼다. 연간 60여 만 냥의 막대한 임대수입이 발생했다. 이 고층건물을 짓는 데에, 땅값 200여 만 냥을 포함하여 모두 760여 만 냥의 비용이 들었는데, 그 후로 13년 동안 중국에서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서순 빌딩의 건축은 서순부동산경영의 일대 사건이었다. 달콤한 맛을 본 서순 가문은 계속해서 고층건물과 서양식 주택을 중점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리버사이드 빌딩, 메트로폴리스 호텔, 캐세이 맨션, 해밀턴 빌딩 등이 세워졌다. 고층건물과 서양식 주택 건축을 위해 캐세이부동산회사는 1930년부터 1932년까지 3년 연속으로 각각 300만 냥, 100만 냥, 150만 냥어치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7) 서순 가문이 돈 버는 방법

서순 가문의 부동산업의 이윤은 주로 두 곳에서 나오는데, 하나는 임대수입이고, 다른 하나는 매매수입이었다. 서순 가문의 임대수익은 어마어마했다. 1915년부터 1926년까지 11년 간 임대로 거둬들인 금액은 은화 105만 냥에 달했다. 1877년부터 1915년까지 38년 동안의 임대료는 모두 합해서 최소한 은화 250만 냥에 달했다. 20%의 관리비용을 제외한다고 해도 순익이 은화 200만 냥이었다. 1924년 이들 땅값은 은화 220만 냥이었는데, 여기에는 부가이익은 포함되지 않았다. 서순 가문이 세운 마오밍茂名 아파트를 예를 들면, 이 아파트가 세워진 1931년 당시의 땅값과 건축비는 420만 원이었는데, 한 해 임대수익은 56만 원이었다. 관리비와 세금을 제외하면 한 해 임대수입은 33만 7120원이었다. 수입 가운데 매년 연 5%의 투자이익을 제외한 것이 한 해 이익이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20년이 되던 해에 420만 원의 투자비가 모두 회수되고, 420만 원을 원금으로 하는 이자 273만 9000원을 얻을 수 있었다.

 

8) 제1의 부동산재벌, 서순 가문

임대수익이 이처럼 많아졌지만, 서순 가문은 계속해서 임대업을 벌여나갔다. 서순 가문의 임대수입은 일시불 지불을 조건으로 하는 매판계약에 따른 것이었다. 1907년 서순 가문은 두 명의 매판업자(션즈시엔沈志賢과 마샤오메이馬小眉)가 서순 양행의 부동산 임대수익을 거둬들이고 매달 말에 전월의 임대수익을 서순 가문에게 지불한다는 계약을 맺었다.(중략) 서순 가문은 주택임대 사업 외에도 부동산거래 사업도 병행했다. 땅값이 오르던 시기인 1930~1931년에, 싼 값에 빨리 사들인 12곳의 부동산을 1년 내에 높은 가격에 팔아 은화 1438만 8719냥을 벌어들였는데, 단 한 번으로 은 1000만 냥 이상의 순익을 남긴 것이다. 1935년 서순 가문이 보유한 부동산은 50여 곳에 달했다. 서순 가문이 보유한 부동산은, 토지면적은 물론이거니와 건물면적으로나 고층건물 수로 보나 모두 상하이 부동산업계에서 제1의 자리를 차지하고, 상하이의 부동산 거물이 되었다.

 

9) 중일전쟁과 서순 가문

1937년 ‘8·13 사변’ 후 상하이의 조계지로서의 지위가 위태롭게 되었다. 서순 가문은 상하이 철수를 결정하고, 워싱턴 아파트, 위자사화원王家沙花園과 삼신부동산기업 등 일부 부동산을 팔고, 그룹 내 자회사와 투자관련 회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싼 값에 팔아치웠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서순 가문 내의 위안둥영업遠東營業, 상하이부동산투자기업 등의 운영은 모두 일본군이 맡게 되었다. 1945년 중일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난 후, 서순 가문은 부동산을 돌려받았지만, 그들이 부를 쌓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던 조계 특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장개석 정권은 곧 무너질 듯했고, 경제는 불안정했다. 서순 가문 대표 엘리스 빅터 서순은 “중국에서 대규모 비즈니스를 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하이부동산기업, 동방부동산기업 등의 자회사가 정리됐고, 웬둥영업, 상하이부동산투자 등은 상하이지점으로 개편되고, 홍콩에 본사가 세워졌다. 자산 역시 홍콩 달러로 바뀌고 동시에 부동산이 대량으로 처분되었다.

 

10) 서순 가문, 중국을 떠나다

상하이가 해방된 후, 서순 가문은 막대한 빚 때문에 1958년 10월 31일, 서순 가문, 신서순은행, 캐세이부동산기업 등을 포함한 모두 9개 기업의 중국 내 재산 전부를 중화기업공사中華企業公司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빚을 갚고, 중국에서의 모든 사업을 끝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