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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이야기

영국에서 날아온 도널드 서순 인터뷰!

 

동아일보 신나리 기자가 진행한 저자 인터뷰입니다. 저희 책 가지고 기사를 쓰신다고 도널드 서순 교수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고 하시네요.(아 이런 정성어린!) 그 궁금했던 비달 사순과 도널드 서순의 관계도 밝혀집니다. 기자님의 허락을 받고 블로그에 자랑스럽게 게시합니다! (인터뷰 하신 기자님, 친히 번역해주신 오숙은 선생님, 고맙습니다.)

 

 


 

 

신나리 님께

 

신나리 님의 질문에 대한 제 답장입니다.
우선은 제 이름의 정확한 철자는 Donald(Donal이 아니라)임을 알려드립니다.

 

1. 저는 이 책이 1800년대 이후 유럽 문화시장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최초의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출판산업, 미디어, 영화 등등에 관한 책들은 있었지만, 문화산업의 모든 측면을 다루는 통합적인 역사를 한 권으로 내놓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서적출판, 음악출판, 연극, 오페라, 콘서트, 축음기 산업, 연재만화를 포함한 신문, 악기, 악보, 그리고 카세트, 워크맨, 아이팟까지 이르는 음악 시장 등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발전과, 영화가 소설과 신문을 차용한 과정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에 소설을 구매하던 여러 가지 방법들(도서 대여점에서 빌리기, 신문 연재의 형태로 소설로 읽기, 그리고 물론, 실제로 책 사기)을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팔리는 방식이 그 내용을 규정하는 방식을 검토했습니다. 이를테면 연재소설에서 매 챕터 끝마다 서스펜스를 넣어야 했던 이유는 독자들이 다음 연재분을 사도록 만들기 것이었죠. 이런 서사 방식은 나중에 방송에서도 채택되었습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면, 최초의 레코드는 겨우 3분 정도 분량의 음악밖에 실을 수 없었는데, 때문에 짧은 음악들(오페라 아리아와 대중가요)의 판매가 촉진되었지요. 그러나 저는 20세기도 이 책에서 다루었는데, 대중소설 쓰기와 소리의 발달, 영화 발전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고, 이어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혁명’을 검토했습니다.

 

이 혁명은 첫째는 라디오 시스템을 통해서, 그 다음엔 텔레비전 시스템을 통해 음악, 뉴스, 이야기, 논쟁, 선전, 강연, 코미디 등등을 보통사람들의 가정에 가져가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저는 또 미국과 문화산업의 연관성을 검토하고, 심지어 시장경제 속에서도 미국이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우선은 라디오에서, 그 다음은 텔레비전에서 어떻게 전국적 방송 시스템을 구축한 초기 비용을 모두 흡수했는지 그 과정을 짚어보았습니다.

 

민간 방송의 본격적인 발전은 1960년대와 그 후에 비로소 일어났습니다. 저는 또한 방송이 국가의 자금 지원이나 국가의 세금 징수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광고로 보조금을 충당했는지 검토했습니다. 이로써 문화 보급의 가장 중요한 형태가 소비자에게 무료이거나 무료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 문화를 무료로 얻는 습관이 더욱 굳어지게 된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더욱 문제가 되는 상황이죠.

 

한편 도덕에 기반한 검열의 형태로든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서든, 문화시장에 가하는 국가의 제약을 검토했습니다(공산주의 치하의 문화에 관해선 몇몇 장을 따로 할애했습니다). 그밖에 다음에 대해서도 많은 내용을 다룹니다.

 

① 문화생산의 보수주의(문화생산은 과거 성공작에 대한 평가에 의존하고, 필요 이상의 위험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② 특정 시기 선진 국가와 후발 국가들의 역할. 예를 들어 19세기 프랑스와 영국 소설의 지배적 역할, 19세기 독일 기악과 이탈리아 오페라 음악의 지배, 특정 시장에서의 미국의 등장-대중음악(주로 1945년 이후), 영화 픽션(1914년 이후), 텔레비전 픽션 등.
③ 사용자와 생산자, 광고주 사이의 관계

 

2. 미술(회화)를 배제한 유럽사를 설명한다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지는데, 그러신 이유가 있습니까?

 

문화란 단어는 매우 포괄적입니다. 관습, 의복, 전통, 종교, 음식, 건축 등등도 포함할 수 있지요. 어쨌거나 이 책은 매우 길기 때문에 책의 범위를 한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문화산업’(인쇄된 것, 음악, 영화, TV 등)이라고 부르는 것만 다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시각적인 것이라도 산업의 일부일 때, 이를테면 연재만화, 그래픽 디자인, 책에 들어가는 그림과 삽화의 경우는 포함시켰습니다.

 

제가 보기에 미술시장은 ‘고유한’ 작품들을 사고파는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매우 투기적인 시장이며, 작품의 가치는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산다면, 나는 그 책을 읽기 위해서 사는 거지 그 ‘가치’가 커질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나는 그 책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예상하겠죠(중고책은 새 책보다 싸니까요). 반면에 그림의 경우는 설사 구매자가 그 그림이 마음에 들어 샀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가 유지되거나 커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3. 사실 이 책은 한국인들이 읽기에는 좀 깁니다. 괜찮으시다면 이 책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추천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리고 독자들을 위해 ‘필독’해야 할 부분을 골라주신다면요?

 

이 책이 아주 길다는 건 저도 압니다. 비단 한국 독자들에게만 긴 건 아니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꼭 다 읽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첫 장과 마지막 장을 읽고 그 다음은 관심 가는 대로 읽으라고 권합니다. 어떤 독자는 문학이나 영화, 연극보다는 음악에 관한 부분을 더 읽고 싶어 하고, 또 누구는 최근의 장들(5부는 1920년 이후의 발전을 다룹니다)을 더 읽고 싶어 하겠죠.

 

그러나 저는 4부(1880~1920)는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문화상품의 생산과 보급에서 중요한 혁명들-- 영화, 음악 기록, 라디오 방송 등--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이죠. 그 전까지는 문화를 소비하고 싶다면 무언가(책, 신문, 악보, 악기)를 사서 집에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어디(극장, 콘서트 홀 등)를 찾아가서 여하튼 실황 공연자들이 나오는 일회성의 고유한 공연을 봐야 했습니다. 1880년 이후부터는 공연을 집에 가져올 수도 있고(레코드), 한 픽션을 해석하는 배우들을 그대로 똑같이 볼 수도 있었고(영화), 집에서도 편안하게 멀리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세계, 도서관을 통째로, 모든 음악을 들고 다닐 수 있고 거의 모든 사람과 접촉할 수 있게 된 세계의 시초입니다.

 

4. 호기심에서 여쭙는데, 선생님 성이 비달 사순의 성과 같습니다. 비달 사순과 선생님 사이에 어떤 관계라도 있나요?
 
아뇨, 가까운 친척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사순 가문은 바그다드에서 기원해서 중동 나머지 지역과 인도, 영국, 미국으로까지 퍼진 아주 큰 유대인 가문입니다. 저는 이집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시리아의 알레포 출신이고, 할머니는 당시 콘스탄티노플 출신이셨거든요. 그래서 비달과 저는 친척뻘이기는 해도 아주 먼 먼 친척일 뿐입니다.

 

5. 최근 일부 유럽 국가들이 경제 위기를 겪고 있어서, EU의 통합과 정체성에 관해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해법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이 위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분명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고, 이 위기를 예측했던 전문가들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언제 어떻게, 그리고 우리가 과연 이 위기를 빠져나갈 수나 있는지 말해줄 전문가도 거의 없습니다.
사실 위기는 항상 우리 곁에 있어왔어요. 위기는 자본주의 역사의 일부입니다. 승자와 패자가 생기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결과는 불분명합니다. 1929년의 위기 즉 대공황은 다른 모든 위기들이 비교되곤 하는 원형 위기(Ur-crisis)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경기침체가 1929년의 그것만큼 나쁠까요? 최근 OECD 데이터는 특히나 유럽에 대해서는 희망적이지 않더군요. 비교가 항상 유용하기는 하지만, 1929년의 위기는 오늘날의 위기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당연히 세계가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죠. 세계는 더 글로벌화되었고, 더 금융자본화되었으며(서구에서), 더 산업화되었습니다(우리가 제3세계에 대해 쓰곤 했던 말로).

 

1929년의 공황은 1936년께에야 끝난 것으로 보였지만, 1년 후 두 번째 깊은 침체가 위협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2차 세계대전이 그 상황을 해결해주었죠, 엄청난 국가적 부양책 덕분이었어요. 케인스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어 참호를 파고 그걸 다시 메우도록 시키는 게 가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그 일을 더 잘하죠. 사람들을 고용해 대량 파괴 무기들을 생산하고 또 사용하게 만드니까요. 그 결과 유럽은 국제 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영원히 잃게 되었고, 미국은 정치적 패권을 확립하고 소련이 세계 권력으로 떠오르게 되었죠.


물론 오늘날 국제전의 가능성은 요원하고, 모든 사람이 중국에 베팅하고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1929년의 공황을 예측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 결과를 짐작한 사람은 더욱 적었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현재의 위기를 예측한 사람도 거의 없었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정말 중요한 사건들(이슬람 근본주의의 등장, 소련의 종말, 아랍의 봄 등등)의 예측과 관련해서, 우리는 염소들을 도살해 그 내장을 가지고 미래를 점 쳤던 우리 조상보다 별로 나을 게 없습니다. 물론 역사학자로서 제가 하는 일이란, 위기를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과거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움을 갖지 않는 게 고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