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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신들은 목마르다> 본문 맛보기

뿌리와이파리 2012. 10. 13. 02:00

1793년 공포정치가 행해지던 파리에서 스러져 간 한 청년 이야기인 <신들은 목마르다>의 본문을 살짝 보여드릴게요. 작가는 <타이스>, <붉은 백합>등으로 유명한 아나톨 프랑스랍니다.

 

“나는 그 오스트리아 여자[마리 앙투아네트]를 진짜 싫어했다. 너무 거만하고 너무 낭비가 심했거든. 왕은 말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왕이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나서야 생각을 바꾸게 되었지만. 결국, 내 비록 얼마간 행복한 시간을 보낸 적도 있긴 하지만 구체제가 그립지는 않아. 하지만 대혁명이 평등을 정착시킬 거라고는 말하지 마라. 사람들은 결코 평등하지 못할 거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거든. 그러니 아무리 나라를 뒤집어엎어봤자 소용없어.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살찐 사람과 마른 사람은 언제고 있을 테니.” (26쪽)

 

검사실에서 나온 가믈랭은 법원의 회랑을 가로질러, 온갖 종류의 물건이 멋지게 진열되어 있는 가게들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여시민 테노의 진열대에서 역사·정치·철학 서적을, 『노예들의 굴레』, 『전제군주제론』, 『왕비들의 범죄』를 뒤적였다. “좋아! 공화파 책들이로군!” 하고 중얼거리고는 책방 주인에게 그런 책들이 계속 팔리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요집하고 소설책밖에 안 나가요.”

그러면서 그녀는 서랍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내더니 덧붙여서 말했다.

“이게 뭔가 재미있는 책인가 봐요”

『속옷 바람의 수녀』라는 제목이 에바리스트의 눈에 들어왔다. (110쪽)

 

혁명재판소는 귀족과 부자들에게 그러하듯 인부와 하녀들에게도 엄격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평등을 확립해갔다. 가믈랭은 민중체제하에서는 사정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않았다. 민중을 형벌에서 배제하는 것이 오히려 민중에 대한 멸시와 모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민중을 징벌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간주하는 것이었으리라. 귀족 전용 단두대가 그에게는 일종의 불공평한 특권처럼 보였을 것이다. 가믈랭은 징벌에 대해서 종교적이고 비의적인 관념을 갖기 시작했으며 징벌에 어떤 효력,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죄인들에게는 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들에게 벌을 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피해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69쪽)

 

사형의 광란에 자살의 광란이 응수하고 있다. 여기, 파리 고등법원 부속 감옥에는 잘생기고 강건하며 사랑받는 한 젊은 군인이 잡혀 있다. 그는 “저를 위해 살아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사랑스러운 애인과 감옥에서 결별했다. 그녀를 위해서도, 사랑을 위해서도, 영광을 위해서도, 살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자신의 기소장으로 담뱃불을 붙였다. 그리고 공화주의자인 그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기에, 죽기 위해 왕정주의자가 된다. 혁명재판소는 그에게 무죄선고를 내리려고 애쓰나, 피고가 하도 강경해 재판관과 배심원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주장을 인정하고 만다. (177~178쪽)

 

“그렇다면 신부님, 현재의 혁명 속에서,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하느님, 그분의 처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영감님.”

“에피쿠로스가 말했죠, 신은 악을 막기를 원하나 그렇게 할 수가 없든지, 막을 수는 있으나 그러기를 원치 않든지, 막을 수도 없고 막기를 원치도 않든지, 그것도 아니면 막기를 원하며 막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막기를 원하나 막을 수가 없다면 신은 무능력한 것이고, 막을 순 있으나 그러길 원치 않는다면 사악한 것이며, 막을 수도 없고 그러길 원치도 않는다면 무능력하고 사악한 것이지요. 막길 원하며 막을 수도 있다면, 왜 신은 그리하지 않는 겁니까, 신부님?” (186쪽)

 

신분과 성격이 각양각색인—한쪽은 유식하고 다른 한쪽은 무식한—배심원들은 비열하거나 관대했고, 순하거나 거칠었으며, 위선적이거나 솔직했다. 하지만 다들 조국과 공화국이 처한 위험상황 속에서 똑같은 불안감을 느끼거나 느끼는 체하고, 미덕 또는 공포로 잔인해져서 같은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체하며, 자신의 당연한 직무 수행을 통해 마음껏 죽음을 양산해내는 단 하나의 존재, 귀먹고 성난 단 하나의 얼굴, 단 하나의 영혼, 광신적인 한 마리의 짐승을 형성하고 있었다. 감성적으로 너그럽거나 잔인한 그들은 난데없이 솟구치는 연민에 불현듯 사로잡혀, 한 시간 전에 빈정거리며 유죄판결을 내렸던 피고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196쪽)

 

검사 측은 모든 혐의자에 대해 사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브로토가 제일 먼저 심문을 받았다.

“음모를 꾸몄나?”

“아닙니다. 저는 음모를 꾸미지 않았습니다. 방금 들은 기소장의 모든 내용은 거짓입니다.”

“그것 봐, 피고는 이 순간에도 또 혁명재판소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은가.” (269쪽)

 

가믈랭은 갑자기 그 아이를 두 팔로 번쩍 안아 올렸다.

“꼬마야! 너는 자유롭게, 행복하게 자랄 것이야. 그건 이 파렴치한 가믈랭 덕분일 게다. 이 아저씨가 잔인한 것은 네가 행복해지게 하려고 그러는 거란다. 네가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려고 잔혹한 것이야. 앞으로는 모든 프랑스인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포옹할 수 있게 하려고 몰인정한 거란다.”

그는 아이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얘야, 네가 어른이 되면 네 행복, 네 순수함은 이 아저씨 덕분일 게다. 그런데 말이다, 언젠가 내 이름을 듣게 된다면 너는 그 이름을 증오하고 말 게다.” (283쪽)

 

마부가 야윈 말을 채찍으로 때리자 야유 속에서 마차행렬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믈랭을 알아보는 아낙들이 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 꺼져버려! 흡혈귀 같은 놈아! 일당 18프랑짜리 살인자야! …… 저놈이 이제야 웃지 않는구먼. 보세요, 저 비열한 놈이 얼마나 창백한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믈랭과 그의 동료들이 단두대로 보낸 음모자와 귀족, 과격파와 관용파들을 모욕했던 바로 그 아낙들이었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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