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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문화를 망친다고? 역사를 모르는 소리 <유럽 문화사>

<유럽 문화사>

도널드 서순 지음·오숙은 외 옮김/전 5권·500∼672쪽·각권 2만8000원·뿌리와이파리

 

 

유럽 사람들은 1920~60년대 내내 영화·라디오 등 당시 막 발명됐던 대중미디어에 푹 빠져 살았다. 더 강력한 매체인 TV가 대중화되기 전, 놀랍게도 그때가 책·소설·신문 등 활자 매체의 최전성기로 나타났다.

 

당시 ‘활자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예측이 등장했으나 상황은 정반대였다. 베스트셀러는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 번 상영이 시작되면 책은 무섭게 팔려나갔다.

 

그 이전 프랑스혁명 때 등장한 신문에 연재소설이 시작되고, TV·컴퓨터게임이 선보일 때마다 엘리트들은 문화의 타락을 우려했다. 인터넷 시대인 지금도 ‘문화의 사막화 현상’을 걱정하지만, 그것도 엄살이다. 『유럽문화사』에 따르면 “인터넷은 문화의 확산을 막는 장애물을 치워버린다.”(제5권 366쪽)

 

문화의 대세가 그렇다. 세상 모든 걸 바꾼 지난 200년의 특징은 ‘문화시장의 빅뱅’에 있다. 오페라·연극에서 신문·잡지 등 새로 등장한 문화형식의 소비는 빠르게 성장한 시민계층이 주도했다. 근대 이전과 달리 유럽 200년의 문화소비는 전적으로 시장에 의존해 팽창했고, 이 통에 세상은 참 좋아졌다.

 

그걸 콕 찍어 지적한 책 서문이 인상적이다. “1800년의 귀족보다 2000년의 점원이 문화적으로 풍요롭다.” 이런 내용 하나하나보다 경이로운 건 『유럽문화사』 그 자체이다. 대작인데, 괜히 엄숙하지 않고 엄청 재미있다. 비견할 만한 건 아르놀트 하우저의 옛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창비)쯤이 될까.

 

그걸 꺼내 비교해보니 지루해서 혼났다. 왜 이렇게 사뭇 다르지. 고급·대중문화의 칸막이를 없애버린 결과이다. 『유럽문화사』는 외려 저급문화를 선호한다. 영화의 경우 작가주의 감독 장뤼크 고다르는 빼고 앨프리드 히치콕만 다룬다. 음악을 다룰 때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안 나오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만 조명한다. 총 2억 장이 팔려 클래식 중 최고를 기록한 게 스타 카라얀이니까.

 

역사의 시선으로 보면 고급문화·대중문화 경계란 거의 의미 없다고 저자는 확신한다. 내용은 유럽문화사에 국한하지만 한국 이야기 등도 종종 등장해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1994년 세계 음반판매량 중 클래식 음반의 비중 통계. 최고(네덜란드 14%)에서 미국(3.7%)까지 다양한데, 한국은 중상위권이다. 무려 8.8%. 클래식 음악소비에 관한 한 우리가 영국(8.7%), 이탈리아(7.9%)보다 강하다. 2000년까지를 다루니까 마돈나와 비틀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도 다룬다.


실은 원서 1645쪽이지만, 한국어판은 총 5권에 걸쳐 2790쪽이다. 도판을 새로 넣는 정성 때문인데, 완벽을 기하는 번역만 3년 반 걸렸다. 그것도 사람 별로 쪼개지 않고 번역자 넷이 매달 생맥주 모임을 가지면서 작업한 진정한 협업(協業)이었다고 한다. 책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쉽게 느껴진다.

 

원저자는 조금 낯설다. 유럽 비교사 교수(런던대 퀸메리 칼리지)다. 영국 학술원 등의 지원을 받아 10년 걸려 완성했다는데, 정말 탁월하다. 비유컨대 큰 붓과 세필(細筆)을 함께 구사하는 방식이다. 큰 붓을 들어 윤곽을 잡은 뒤 섬세한 터치로 디테일을 완성해나가는데, 대작 맞다.

 

조우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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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28일 중앙일보에 실린 서평입니다.

기사 원문은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7/28/8516412.html?cloc=olink|article|defau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