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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세계시민주의 전통

뿌리와이파리 2020. 8. 28. 17:18

원제: The Cosmopolitan Tradition: A Noble but Flawed Ideal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판형 153*224mm, 348쪽, 값 18,000원 2020년 6월 30일 펴냄

 

1. 이 책은…

누군가 그에게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

두려우면 마음이 좁아진다. 지금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세계적 유행병 코로나바이러스의 시대에는 두려움을 품을 만한 이유가 너무도 많다. (…) 두려움의 시대에는 국경 너머를 생각하며 우리 모두가 공동의 문제를 겪고 있는 단일한 세계의 시민이라는 것을 생각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 이처럼 도덕적으로 위험한 시대에,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출생이나 국적 같은 우연이 공동의 책임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상의 고귀한 전통에 대해 숙고해보면 다시 용기가 날지 모르겠다. 내가 이 책에서 탐구하는 철학적 전통은 이런 생각을 ‘세계시민주의’라고 부른다. 
―마사 C. 누스바움, 한국어판 서문

 

포스트-코로나,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할 새로운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2019년 12월경 중국에서 처음 발생했을 때만 해도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렇게까지 전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적 대유행병(pandemic)이 될 것으로 확신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하기로 한 것은 동남아나 연변 지역에서 입국한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 등 오랜 세월에 걸쳐 일상화된 문제들에 대해서, 혹은 시리아 난민 수용 여부를 두고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진 토론과 그 토론에 섞여 있던 온갖 혐오 발언에서 드러나는 딱히 세계시민주의적이지 않은 인식에 대해서 이 책이 전해줄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화두는 ‘세계화’나 ‘국제화’처럼 너무 흔하고 낡게 느껴지는 흐름 속에서 분명 유의미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어찌 보면 일상보다는 공론장에서 더 익숙한 화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냈다. 이제 우리 대부분은, 적어도 이 기세등등한 유행병에 관해서만큼은 나 자신이 좋든 싫든 한 지역 혹은 국가에 속한 개인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세계의 인류, 더 나아가 인류를 둘러싼 자연계까지 포괄하는 더 큰 세계에 단단히 얽혀 그 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
물론 국내에서도 중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혐오가 눈에 띄고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그런 혐오가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사람들 전체에 대한 차별과 공격으로 이어진 사례가 연일 보도되는 등 이런 연결성을 억지로 부인하거나 끊어내려는 헛된 시도는 분명히 존재한다. 코로나 대유행이 그간의 세계화 추세를 뒤집고 각국의 폐쇄적‧배타적 민족주의 정책을 부추기리라는 어두운 전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새로 출현하는, 우리가 새로 만들어나가야 할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이 책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바로 그런 고민에 유의미한 발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고귀하지만 결함 있는’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누스바움의 비전
이 책은 그리스와 로마의 스토아주의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17세기의 휴고 그로티우스, 18세기의 애덤 스미스, 현대의 국제 인권운동에 이르기까지 세계시민주의의 철학적 전통을 좇는다. 더 나아가 누스바움은 그 안에 담긴 ‘고귀하지만 결함 있는’ 긴장관계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전통은 고귀한 것으로서, 도덕적 성격은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온전하고 전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에게 이기주의와 파벌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와 한층 높은 차원의 세계에 참여하라고 요청한다. 반면 ‘결함 있는’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정의의 의무’에만 초점을 맞추고 물질적 원조의 의무를 간과한다. 물질적 불평등에는 충분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민이나 시민권의 조건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종교적 다원주의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으며, 인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포용하지 못한다. 기존 세계시민주의의 가장 심각한 잘못은 다른 종과 자연 환경에 대해 우리가 지고 있는 도덕적·정치적 의무를 숙고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누스바움은 ‘세계시민주의 전통’에서 존경받아 마땅한 요소들을 계승하는 동시에 이 ‘결함’과 대결하며 전통을 넘어서는 방식을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과 인간의 생명으로 이루어진 세계 전체에 대해 폭넓게, 포용적으로 사고하라는 세계시민주의 전통의 요청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함께 지구에서 살아가는 비인간 동물과 자연계의 도덕적 권리를 인정하는 문제까지 인식해야 한다. 누스바움은 이런 문제에 대해 ‘역량 접근(Capabilities Approach)’이라는 자신만의 관점을 적용하여, 억압당하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우리 세계의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 
서구 사상에서 세계시민주의 정치의 전통은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은 “세계의 시민”이라고 대답했던 그리스의 키니코스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로부터 시작됐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혈통이나 소속 도시, 사회적 계층, 성별을 선언하는 대신 자신을 인간으로 정의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평등 간 가치를 암묵적으로 주장했다.
정치가 인간을 서로 평등한 존재인 동시에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진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생각은 서구 사상의 가장 근본적이고 영향력 있는 통찰 중 하나로, 이러한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가치 추구는 현대의 인권운동으로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물질적 빈곤, 신체적‧인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사회적 기회 축소,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신념 충돌, 대량이민과 난민이라는 난제 등이 만연해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정치적 원칙을 수용해야 할까? 
세계시민주의 전통에 속하는 학자들과 철학의 대표적 사례를 선정하여 그들의 교설을 탐사하고 개선해가는 논리적 궤도를 따르는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우리가 서로를 구별하는 그 모든 차이점보다는 함께 나누는 인간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출생이나 국적 같은 우연이 공동의 책임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세계시민주의 사상의 고귀한 전통과 더불어 더 나은 방향으로의 확장까지 숙고해보는 것이 이 시대에 중요한 화두가 되리라 믿는다.  

 

 

2. 지은이와 옮긴이 소개

지은이 마사 C. 누스바움
세계적으로 저명한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 고전학자, 여성학자로서 뉴욕대학교에서 연극학과 서양 고전학으로 학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고전 철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교와 브라운대학교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시카고대학교 에른스트 프룬드 법윤리학 종신교수 겸 철학부 교수다. 노엄 촘스키, 움베르토 에코 등과 함께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선정하는 ‘세계 100대 지성’에 선정되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시적 정의』 『혐오와 수치심』 『감정의 격동』 『역량의 창조』 『혐오에서 인류애로』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인간성 수업』 『분노와 용서』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등 수많은 책을 썼다. 
미국철학학회의 헨리 M. 필립스상, 아스투리아스공상, 프레미오 노니노상, 교토상,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의 돈 M. 랜들상, 최고의 철학가와 사상가에게 주어지는 베르그루엔 철학상 등 세계 각국에서 철학 및 법학 분야의 저명한 상을 수상했다. 

옮긴이 강동혁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면서도 새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책들을 쓰거나 소개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번역서로는 『혐오에서 인류애로』, 『분노와 용서』 및 다수의 대중소설과 시나리오가 있다. 

 

 

3. 차례

 

한국어판 서문 

제1장 세계의 시민들
1. 코스모스의 시민들
 
제2장 정의의 의무, 물질적 원조의 의무: 키케로의 문제적 유산
1. 정치인의 바이블 
2. 정의의 의무 
3. 물질적 원조의 의무 
4. 선善에 대한 숨어 있는 시각 
5. 이런 구분은 유효할까? 
6. 남은 것은 무엇인가? 

제3장 인간 존엄성의 가치: 스토아주의적 세계시민주의의 두 가지 긴장관계
1. 세계시민 
2. 키니코스학파의 시작 
3. 스토아주의적 독립성 
4. 우연한 피해에 대한 세계시민주의자들의 견해 
5. 스토아주의적 입장의 수정 
6. 배타주의적 정념 

제4장 그로티우스: 국제사회, 그리고 도덕률의 지배를 받는 개인들
1. 세계시민주의의 전통을 근대 세계로 가져오다
2. 국가, 다원주의, 자율성
3. 자연법과 주권 국가들의 세계
4. 전시 국제법: 만민법과 자연법
5. 국민으로서의 개인: 인도주의적 간섭
6. 물질적 원조의 의무
7. 국제사회에 관한 이념

제5장 ‘불구와 기형’: 애덤 스미스, 인간적 역량의 물질적 토대에 관하여
1. 스토아주의적 전통과 물질적 필요
2. 교환의 존엄성
3. 인간 능력의 물질적 토대
4. 초국가적 정치의 대략적 구상
5. 『도덕감정론』의 스토아주의: 정의와 선행
6. 『도덕감정론』의 스토아주의: 외적인 것과 자제력
7. 마초적 스토아주의와 인간 존엄성

제6장 세계시민주의 전통과 오늘날의 세계: 다섯 가지 문제들
1. 오늘날의 우주적 도시
2. 첫 번째 문제: 도덕심리학
3. 두 번째 문제: 다원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
4. 세 번째 문제: 국제인권법의 한계
5. 네 번째 문제: 해외 원조의 비효율성과 도덕적 난점
6. 다섯 번째 문제: 망명과 이민 275

제7장 세계시민주의에서 역량 접근으로
1. CA: 동기와 주장 
2. 정의와 물질적 원조: 분지는 없다 
3. 국가와 국제사회 
4. 국내외의 정치적 자유주의 
5. 기본에 도전하다: 수많은 존재, 수많은 형태의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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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본문에서

이렇게 볼 때 세계시민주의 전통의 여러 개념은 엄청나게 풍요로우며, 다양한 전통에서 유래한 비슷한 개념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세계시민주의 전통을 만들어온 서구의 사상가들은 이 전통이 계속해서 씨름해온 문제점을 함께 도입했다. 그들은 인간이 삶의 우연한 사건에 침해당하지 않는 존엄한 존재라면 돈, 지위, 권력을 코웃음으로 넘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요소들이 인간의 번영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도덕적 능력이라는 존엄성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살림살이의 개선이나 시민권, 보건을 요구하지 않았다. 디오게네스에게 있어 해야 할 말은 “해나 가리지 말고 비켜”뿐이었다. (19-20쪽)

키케로처럼 그로티우스도 국가에 도덕적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는 국가와 그 국민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도 도덕적 의무를 진다고 주장한다. (이 책 전체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그로티우스와 내가 권장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도덕적 중심성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너무 익숙하게 출현하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떠들어대는 자국 중심주의적 민족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식의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금지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인도주의와 국가주권에 관한 주장들과 씨름할 때는 그로티우스의 미묘하고도 모순적인 인도주의적 간섭론이 유용한 안내자가 되어준다. (26-27쪽)

인간성은 매일 침해당하고 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공공질서와 공공의 안전을 유지하지 못하는 여러 국가의 단순한 무능 때문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정의의 의무를 정말로 신경쓴다면 우리는 그 때문에라도 물질적 원조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효율적인 국제사법 체제에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면 문제는 더 커진다. 고문, 잔인함, 불의한 전쟁 등등을 다루는 데 최소한의 효율성이라도 보일 수 있는 세계적 사법시스템을 유지하는 데에는 군사적 방면(예컨대 NATO)은 물론 이런 업무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국제적 제도와 교류에도 엄청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이런 비용을 감당하려면 군사적 원조의 형태로든, 다른 형태로든 부국에서 빈국으로의 자원 재분배가 필요하다. 기본적인 인권에 관심을 둔다는 건 좋은 말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돈을 쓴다는 뜻이다. (60-61쪽)

보통 기아가 식량의 부족보다는 식량에 접근할 권리가 없어서 발생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기아는 근본적으로 사회 관행이 원인인 철저히 인간적인 문제다. 가난은 더 그렇다. 누구 탓인지 알아내기 어렵다는 게 아무 부당행위도 벌어지지 않았고 아무 반응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식량 접근권에 관한 공정한 체제만 갖추어져도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릴 역량을 갖추고 있다. (70-71쪽)

세계시민주의적 법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주 깊은 의미에서 평등한 존중과 관심을 받아야 마땅하다. 누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는 우연은 그저 그것, 우연일 뿐이다. 모든 인간이 어느 나라에서든 태어날 수 있었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국적, 계급, 민족, 심지어 성별의 차이가 우리와 동료 인간들 사이에 장벽을 세우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발현되든 인간성을 인정하고, 그 인간성에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충성과 존중을 바쳐야 한다. 마르쿠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토니누스로서의 내 도시와 조국은 로마다. 인간으로서의 내 도시와 조국은 세계다”(VI.44). (100-101쪽)

이런 주장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스토아주의적 기획은 벌써 곤경에 빠지고 만다. 이런 주장은 인간 존엄성이 바위처럼 단단한 게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 존엄성은 가혹한 기후에서 시들어버리는 “연약한 식물”이다. 즉, 우리는 물질적 자원의 분배가 인간 존엄성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존엄성에는 최소한 생명이 요구되며, 아이들의 생명은 이런 물질적 안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당대 사회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랬듯 아주 어린 아이들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점은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스토아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렇게 어린 아이들에게는 생명을 계속해갈 권리가 비-인간 동물들이 가진 권리 정도밖에 없었다. 아니면, 그들은 단지 영아 사망률에 사회가 영향을 끼칠 방법은 거의 없다고 단순히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두 가지 생각은 당시에든 오늘날에든 틀린 것이다. (199쪽)

그러나 허용할 만하고 심지어 칭찬할 만한 애국주의의 특징을 설명할 때부터 스미스는 비판을 끼워 넣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한다. (……) 스미스는 “그리고, 나는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유명한 말로 모든 연설을 끝냈던 대大카토를 나무라며, 그것을 “강인하지만 조악한 정신의 야만적인 애국주의”라고 부른다. 그와 반대였던 스키피오의 침략 반대 입장은 “좀더 확장되고 개명된 정신의 자유로운 표현”(228)이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스미스는 애국주의가 국제법을 어기고 타국의 번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방향으로 여러 국가를 이끌어갈 때는 애국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이제 그는 당대의 상황으로 눈을 돌린다. (211-212쪽)

하지만 대규모 재단들이 제대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관리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집중은 두 번째 문제,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문제를 증대시킬 뿐이다. NGO가 전 세계적인 강력한 정책의 입안자가 된다면 국가의 주권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약화되는 것과 똑같이 확실하게 약화된다. 대규모 재단은 보통 이윤 지향적인 다국적 기업들과는 달리 자선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선량한 온정주의도 그 자체로 도덕적 문제가 있다. (……) 게다가 선량한 온정주의는 통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이유는 단순한데, 그것이 온정주의적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윌리엄 이스털리는 ‘빈자들의 잊힌 권리’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전문가들의 폭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많은 부분 변화의 주체가 그 나라 주민이 아니면서도 자신이 그 나라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일상적이고도 잘못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268-269쪽) 

그렇다면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어떻게 되는가? (……) 디턴이 말하듯, 베푸는 행위가 베푸는 사람에게 따뜻한 빛을 둘러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행복감은 확실히 주된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달갑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자선 행위를 하고 기뻐하기보다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주체성을 존중해야 한다. 디턴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의 인생을 자동차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와 함께 연구하기 위해 다양한 국가에서 프린스턴으로 오는 학생들에게 디턴이 들려주는 조언은 단순하다. 돌아가서 자기 나라의 정치적 절차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부유한 사회들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나라에 엄청난 불평등이 포함되어 있고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절차를 통해 그런 것들과 싸움을 해나가는 것이 우리의 에너지와 자원을 아주 잘 쓸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73쪽)

인권법 영역에서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아주 타당하다. 이 전통이 가장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세계, 즉 진화해가는 국제적 도덕성과 몇몇 국제법으로 묶여 있으되 그 집행은 주로 각국 내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원조의 영역에서, 세계시민주의 전통은 다시 한번 우리의 생각에 좋은 지침이 되어준다. 이 전통은 공화주의적 제도와 그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에게 독선적인 온정주의를 피하는 것의 중요성을 경고하고 원조의 효율성에 관한 최고의 경험적 증거를 참조할 것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민이라는 까다롭고도 중요한 분야에서 세계시민주의 전통(특히 그로티우스)은 우리 시대의 가장 논쟁적인 문제를 다룰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좋은 원칙들을 제공한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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