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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조선인 강제연행』

신국판|280쪽|2018년 2월 20일 펴냄


1939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이루어진 총력전체제하의 전시 노무동원을, 

그 계획의 책정과정, 무모한 동원의 실태, 동원 속에서 일상화된 폭력,  

그리고 동원체제의 붕괴까지 기본사료를 통해 총체적으로 포착한다! 



“조선인은 징용되지 않는 차별을 받았다” 


‘강제성’과 ‘폭력성’ 논란을 넘어, 

조선인 노무동원의 실체를,  

나아가 일본제국의 식민지 통치의 본질과 특성을 입체적으로 규명한다 


‘징용’은 왜 해방 1년 전에야, 일본인보다 늦게, 더 적게 시행되었을까 

1944년 8월 8일, 일본 내지에서 일하게 할 조선인 인원의 확보를 촉진하기 위해 신규 징용을 실시한다고 규정한 「반도인 노무자의 이입에 관한 건」이 각의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9월부터, 그때까지는 군이 고용하는 예외적 경우로만 한정되었던 조선 내 ‘징용’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징용’은 해방/(일본)패전 1년 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징용’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4월에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에 의거, 1939년 7월 8일 공포된 「국민징용령」에 따라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징용’은 법령에 따라, 당연히(!) 국민/신민의 자유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강제징용’이다. ‘징병’이 ‘강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데 질문 하나. 훨씬 가혹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조선인의 징용이 오히려 일본인보다 늦게 적용되고, 그 규모 또한 적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의 조선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민징용령」 제2조는 “징용은 특별한 사유가 있거나 직업소개소의 직업소개와 그 밖의 모집 방법에 의거하여 필요한 인원을 확보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 이를 실시한다”고 규정했고, 징용 대상이 되는 국민등록은 오직 특정 기술자에게만 적용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말에 조선에서 징용을 발동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우선, 이 시점의 징용은 육해군의 직접 고용에 의하거나 군수물자 생산 공장의 노동자를 충원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조선인은 주로 탄광이나 토건공사 현장에 배치되었으므로 분야가 달랐다. 그리고 조선의 행정기구는 국민징용과 관련된 사무적 절차 등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국민노무수첩법」 시행조차 보류되었고, 징용의 전제가 되는 국민등록 또한 미비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제2조의 문구는 1943년 7월 “징용은 국가의 요청에 입각하여 제국 신민으로 하여금 긴요한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이를 실시하도록 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즉, 직업소개소 등에서 인원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에 발동하는 조치였던 징용이 총동원 업무를 위해 긴급히 노동력을 확보하는 중심적인 수단으로 자리매김한 것이고, 그것이 조선에서의 징용 발동으로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70만 명의 ‘노무동원’, 그것은 왜,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한편, ‘조선인 강제연행’으로 일컬어지는, 전시하 조선에서 끌려간 사람들이 일본 내지의 탄광이나 토건공사 현장에서 종사한 노동의 대부분은 노무동원계획(1939~41)・국민동원계획(1942~45)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그 숫자는 70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는 그전부터 일본 내지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전시에 스스로 원해서 일본 내지의 노동현장을 선택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왜 조선인을 억지로 끌어가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또는 그러한 폭력적인 동원은 얼마나 보편적인 현상이었고, 그럴 경우 무엇이 폭력적인 동원을 초래했는가. 조선인 동원의 양상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적용한 법령 및 제도, 실태는 어떻게 달랐고, 애당초 동일한 일본제국의 영역이었던 조선에서 일본과 다른 형태의 동원이 실시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제국 권력 일각에서 조선인의 일본 내지 동원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인에 대한 전시 동원의 ‘강제성’과 ‘폭력성’ 문제에 대해, 저자는 ‘연행단계의 명확히 강제적인 전시 동원’에서 국가의 가해성을 찾아온 기존의 논의를 넘어 명확하게 “연행단계에서의 강제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 그후를 포함한 인권침해가 문제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일본제국의 노무동원 정책은, 민중에게 현저한 인권침해를 초래했다는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군수물자 증산과 전쟁 승리라는 일본제국의 목표에도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실패한 정책이었다고. 그렇다면 이처럼 정책 전개가 파탄에 이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전시하 조선인 노무동원의 전모를 일곱 개의 장으로 그려낸다. 먼저 서장에서는 조선인 강제연행을 둘러싼 논의, 그리고 저자의 문제의식을 정리한다. 제1~5장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노무동원 정책과 수행 실태, 거기서 생겨난 여러 문제, 그에 대한 대응 및 동시대의 논의 등을 시계열별로 정리한다. 제1장에서는 대량의 조선인을 노동자로 도입하게 되는 배경과 관련 논의를 바탕으로 1939년도에 어떤 방식으로 실행되었는지 알아본다. 제2장에서는 1941년 12월에 일본제국이 미·영과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 시기에 주목해, 이미 조선에서도 노무수급이 매우 절박해진 상황이 포착되고, 일본 내지에서는 이미 시작된 조선인의 동원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의문시하는 목소리가 제기된 사실 등을 밝힌다. 제3장에서는 미·영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제국이 조선인 노동력의 동원을 확대한 실태와, 그에 따라 확대된 모순에 대해 1942년도와 1943년도 시기를 살펴본다.  

제4장에서는 노동력 고갈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노무동원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원활한 동원을 위해 고안한 대책이 실질적으로는 기능하지 않았던 상황을 알아본다. 제5장에서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도에 실시된 정책 자체가 파탄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일본제국의 패전 이후 상황도 함께 다룬다. 마지막으로 종장에서는 사료를 통해 드러난 사실에 입각해, 노무동원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일본인과 평등한 존재로 여겨졌어야 할) 조선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수반한 이유와, 전쟁 수행을 위한 생산력 증강에도 보탬이 되지 않았던 정책이 실행된 이유, 그리고 조선인 강제연행을 통해 드러나는 당시 일본사회나 식민지 조선의 실태가 갖는 특징을 검토한다.  


‘징용되지 않는 차별’, 그리고 제국/식민지 체제를 넘어서기 위하여 

이 책에는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우리 사회 일반의 고정관념 혹은 이미지와는 다른 사실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그중 하나, 조선인 피동원자는 ‘징용되지 않는 차별’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가.  

 “「국민징용령」으로 동원된 사람(즉, 극히 일부의 조선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일본인)과 그 가족은 부조나 원호 등 국가의 생활원조를 보장받고 있었다. 조선에서 그때까지 「국민징용령」이 발동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 관대한 방법’으로 동원이 계속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앞서 살펴본 대로 조선 내 인원 확보의 실태는 일본 내지에서 이루어진 징용보다 혹독했다) 오히려 국가에 의한 명예, 생활의 원조 대상에서 제외되는 현실을 초래했다는 뜻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조선인 노무동원’은 단지 조선민족이 입은 피해의 규모를 알리고 일본인에게 가해의 역사와 진지하게 마주하라고 촉구하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국가가 안고 있었던 문제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특질을 파악할 수 있는, 적어도 그를 위한 단서를 포착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나아가 우리가 제국/식민지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소중한 지적 자원이 될 것이다.  



지은이 · 옮긴이 소개 


지은이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1966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와세다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조수,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원 객원연구원 등을 거쳐, 2007년부터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総合문화연구과 준교수, 2015년부터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공은 일본근대사.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형성·구조·변용』, 『일본과 조선 비교·교류사 입문―근세, 근대, 그리고 현대』(공편), 「1940년대의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제국질서하의 다문화상황의 전개와 귀결」, 「식민지기에 있어서 재일조선인의 문화활동」, 「일본제국과 조선인의 이동―논의와 정책」,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내지 도항’ 재고―비준비형 이동·생활전략적 이동과 노동력 통제」 등이 있다.   


옮긴이 김철 

연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교원대와 연세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있다. 주로 한국 근대문학을 통해 식민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 문제를 분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저서로 『‘국민’이라는 노예―한국문학의 기억과 망각』, 『복화술사들―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 『식민지를 안고서』, 『저항과 절망―식민지 조선의 기억을 묻다』(일본어) 등이 있다. 



차례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서문 


서장 조선인 강제연행을 묻는 의미 


제1장 입안 조사, 그리고 준비가 부족한 채로 시동 

1. 식민지기의 조선사회와 인구이동 

2. 노동력 부족에 관한 논의 

3. 법령 정비와 동원계획의 수립 

4. 노동자 확보와 처우 실태 


제2장 ‘잉여’ 없는 노동력의 실정 

1. 동원의 전개와 모순의 표출 

2. 동원에 대한 우려와 이론


제3장 밀려드는 모순 

1. 조선인 노무동원 제도의 재확립 

2. 일본 내지의 동원시책 

3. 곤란해지는 조선 내 인원 확보 

4. 열악한 대우와 생산성의 저하 


제4장 확대되는 사회적 동요와 동원 기피 

1. 전황의 악화와 동원의 확대 

2. 조선 내 징용 발동 

3. 원호시책의 기능부전 


제5장 정책의 파탄과 귀결 

1. 본토 결전 준비와 계속되는 동원 

2. 일본 패전 이후의 귀환과 잔류 

3. 피해자와 가해자, 그후 

종장 폭력과 혼란의 배경과 요인 


후기 

옮기고 나서: 제국의 구멍 

주요 참고문헌 

간략 연표 

찾아보기 



본문에서 


일본 정부는 1934년 10월 「조선인 이주 대책의 건」을 각의결정했다. 이것은 조선인 이동의 통제와 관련해 일본제국이 처음으로 내린 정부 차원의 결정으로, 일본 내지의 일본인 실업 문제나 민족갈등의 격화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에서 일본 내지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최대한 저지・억제하는 내용이었다. 각의결정 이후 실시된 정책은 실제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33년과 1934년의 도일자는 15만 명대, 이 가운데 일시 귀향자의 재도일을 제외한 노동자=신규 도일 노동자는 7만 명대였지만, 1935~1937년에는 도일자가 10만~12만 명대의 추이를 보이며 신규 도일 노동자 또한 3만 명대로 떨어졌고 같은 기간 감소했다.(45쪽) 


조선 농촌의 ‘과잉인구’를 농촌 이외의 공간으로 이동시켜 정리하려고 했던 조선총독부는 당시, 일본의 탄광으로 노동자를 보내는 데에 찬성하지 않았다. 1937년 6월 27일자 『조선일보』는, 조선인 노동자를 알선해달라는 규슈 지방 탄광의 의뢰를 당국이 허가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는 당국이 불허 방침을 정한 이유가, 과거 일본 내지의 탄광이 일만 시켜주면 뭐든지 하겠다는 조선인을 끌어와 값싼 임금으로 혹사시킨 “천대 사실”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선 통치 책임자는 사기성 짙은 모집과 악랄한 노무관리에 따른 조선인의 불만 고조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49쪽)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 같은 체제가 확립되지 않았다. 조선에는 노무 수급을 위한 전문적인 행정기구=직업소개소의 체제가 빈약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일반 지방행정기구인 부・읍・면이 노무동원과 관련된 사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각 사무소가 구인, 구직을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은 개별 기업이 지역사회로 직접 들어가서 모집하는 방법으로 동원계획에서 배정된 인원을 채우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일본 내지와는 달리, 조선 내 노무배치 행정의 기본 법령인 「조선 직업소개소령」에는 연락위원 제도의 규정이 없었다. 이 사실은 기업 관계자가 해당 지역의 질서와 경제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게 노동자를 찾아나서도 이를 막을 수 있는 체계가 없었음을 의미한다.(70쪽) 


일본 정부는 미・영과 전쟁을 시작한 데에 이어 1942년 2월 13일에 「조선인 노무자 활용에 관한 방책」을 각의결정했다. 이 결정은 1934년의 각의결정 「조선인 이주대책의 건」을 대신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로써 조선인 노동자의 도일은 억제가 기본 원칙이고 동원계획에 따른 ‘내지 이주’는 예외로 정했던 방침이 마침내 폐기되었고, 조선인 노동자를 일본 내지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노선이 명확해진 것이다. 이는 일본 내지에서 노무수급의 절박함이 심각해지고 있는 데에 반해 조선에는 아직 노동력에 여유가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다.(116쪽) 


그러면 왜 조선에는 그때까지 징용이 발동되지 않았던 것일까? 일단 앞서 다룬 것처럼 행정기구의 미비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십수만에 이르는 징용 대상자에게 출두를 명하고 전형을 실시한 다음 징용명령서를 교부하는 등의 절차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업무량이었다. 더군다나 국가의 명령으로 총동원 업무를 수행하는 피징용자에 대해서는 이름과 연령, 주소 등을 정확히 파악해 등록하는 사무가 뒤따랐다. 하지만, 징병 대상자의 호적 기재사항조차 부정확한 상황이었던 조선에서 이런 사무를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겠다는 전망은 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에 징용을 발동하지 않은 이유가 또 있었는데, 그것은 동원되는 조선인이 주로 탄광・광산에 배치되기 때문이었다.(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