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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전목의 중국문학사』

전목 강의|섭룡 기록·정리|유병례·윤현숙 옮김

신국판(양장)|484쪽|2018년 9월 18일 펴냄|28,000원



60여 년간 묻혀 있었던 국학대사 전목의 중국문학사 강의

63년 전 9월의 어느 날, 그해에 전목은 만 60세였고, 제자 섭룡은 겨우 25세였다. 전목이 교실을 둘러보며 강단에서 느릿느릿 토해낸 그 한마디 말.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에는 아직 이상적이라 할 만한 문학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이 어디 문학사일 뿐이란 말인가? 그가 말한 것은 바로 자신이 어떻게 그 시대를 걸어왔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시대의 통유通儒 전목의 강의를 담은 누런 필기노트

전목은 중국 근대 4대 역사학자 중 한 사람이자 국학대사로 추앙되었으며, 특히 역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거목이다. 그는 평생 80여 종 1700만 자에 이르는 저서를 지었지만, 중국문학사에 관한 것은 한 권도 없었다. 홍콩으로 망명한 전목이 1955년 홍콩 신아서원에서 개설하였던 중국문학사 강의를 시작하였을 때, 섭룡은 그의 제자였다. 60여 년이 지나 섭룡은 당시 수업을 받으며 기록한 노트를 펼쳐보았다. 그는 누렇게 변한 필기노트를 읽으며 스승과 제자가 함께한 날들을 회상하다가, 60년 이상 된 이 골동품을 세상에 내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전목이 중국문학사를 강의했던 1955년은 홍콩이 여전히 영국정부 통치하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목은 시대의 변화에 한없이 탄식하며 이러한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전통으로부터 찾으려 했지만, 동시에 신문명이 가져온 강한 충격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이러한 심각한 내적 모순은 이 책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역사로 문학을, 역사적 시각으로 문학사를! 

사학계의 일대종사답게 전목은 요堯·순舜·우禹에서 청나라 말기까지 문학의 변화 발전에 대해 독창적인 견해를 밝혔다. 시대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고증을 중시하여 역사 문제에 독자적인 시각을 내보인 것이다. 특히 『초사楚辭』가 장강 유역에서 발생한 문학이 아니라 한수漢水 지역에서 발생한 문학임을 역사 지리적 관점에서 고증하였다. 또한 창의적인 시각으로 1922년, 노신魯迅 등의 근대 학자 가운데 가장 먼저 건안문학의 문학적 성취와 건안문학의 최고봉 조조曹操의 위치를 인식하였다. 『전목의 중국문학사』는 시종일관 전목만의 거시적 논점, 사학적 고증, 인문적 논평, 생동감 있고 간결한 작품 분석으로 역사학자가 쓴 문학‘사’란 어떤 것인지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인화·개성화된 문학사로서 이상적인 중국문학 입문서

문학 연구는 모름지기 자신만의 문학사가 마음에 담겨 있고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학술적 가치를 지닌 문학사는 바로 ‘개인화·개성화된 문학사’이다. 『전목의 중국문학사』는 분명 전목의 개성이 드러난 문학사, 즉 그만의 독립적이면서도 확고한 문화 이념과 심미적 취향이 드러난 문학사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엄숙하고 근엄한 여타의 문학사를 능가한다.


특히 중국문학의 기원에서부터 청나라 말기 장회소설까지 중국문학의 변화와 흐름을 간단명료하게 제시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 시기마다 꼭 읽어야 할 작품들을 정선하여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중국문학에 입문하려는 초보자들에게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큰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 연구의 귀중한 자료

강의 내용을 기록한 원고라서 즉흥적인 말이나 틀린 인용, 또는 잘못 기억한 부분도 있을 수 있었다. 섭룡은 속기를 배웠고 전목의 무석無錫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지만,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 정리를 한 것이라 누락된 부분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책이 정식 출간되기 전에 2014년 7월에서 10월까지 『심천상보深圳商報』에서 강의노트를 연재하면서 학계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누락 또는 오기를 밝혀내는 한편, ‘중국문학사를 다시 쓸 것을 제기하다’라는 주제로 중국문학사라는 전문적인 학술을 대중 앞에 끌어내어 공론화의 장을 만드는 과정이 있었다. 또한 한국어판 『전목의 중국문학사』는 중국문학 전공자인 유병례, 윤현숙 교수가 번역을 하면서 중국어판의 소소한 오류 또한 잡아내었다. 


『전목의 중국문학사』를 읽으면 생동감이 느껴지고, 어떻게 학문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좋은 책 한 권은 단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독자가 그로부터 멀고도 깊은 지식의 세계를 향해 독립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전목의 중국문학사』는 바로 그런 책이다. 




지은이와 옮긴이 소개


강의 전목(첸무)錢穆(1895~1990)

한 시대의 문사철文史哲을 아우르는 국학대사國學大師이자 통유通儒. 자字는 빈사賓四이고, 강소 무석 사람이다. 연경대학·북경대학·청화대학·서남연합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1949년 홍콩으로 이주하여 신아서원新亞書院을 창립하고 학장을 맡았다. 1966년 타이베이로 이주하여, 1990년 8월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저술은 80여 권이 있고, 그 분량이 1700만 자에 달한다.


기록·정리 섭룡(예룽)葉龍(1928~ )

홍콩 능인서원能仁書院 학장, 능인철학연구소와 중국문사연구소中國文史硏究所의 교수와 소장을 역임했다. 신아서원 철학교육과와 신아연구소를 졸업하고, 오랜 기간 전목 밑에서 공부했다. 홍콩 중문대학 역사학과에서 명예문학사 학위를 받고, 홍콩대학에서 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김 유병례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대만사범대학에서 백거이 시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신여대 인문과학대 학장, 한국중어중문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에는 『서리 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붉어라』, 『당시 30수』, 『송사 30수』, 『당시, 황금빛 서정』, 『송사, 노래하는 시』, 『톡톡 시경본색』, 『엄마아빠가 읽어주는 당시』,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라』가 있고, 역서에는 『장한가』, 『중국 시학의 이해』, 『중국문학이론비평사』, 『시인의 죽음』이 있다. 


옮김 윤현숙 

성신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남경대학에서 오신뢰·유위민 교수의 지도하에 중국고전희곡을 공부하여 「이옥시사극연구李玉時事劇硏究」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교통대학교 중국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원곡, 불우한 이들의 통곡』이 있고, 역서에는 『중국문학이론비평사』가 있다. 




차례


서문 

옮긴이 서문 


제1장 - 서론 

문학의 변화에 대해 논하려면 우리는 먼저 문학의 본질에 대해 알아야 한다. 문학사는 문학 흐름의 변천에 대해 논하는 것이니 반드시 역사의 관점에서 문학의 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제2장 - 중국문학의 기원 

문학의 기원은 시가이다. 그러니까 운문이 산문보다 먼저 발생하였다. 서양 역시 그러하다.


제3장 - 『시경』 

『시경』을 읽을 때 한 글자 한 구절 글자의 뜻만 좇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마음으로 체득하여 작가의 감정과 생각에 부합해야 한다.


제4장 - 『상서』 

중국의 산문은 역사를 대종으로 삼는다. 중국은 줄곧 역사서를 문학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상서』는 말을 기록하고, 『춘추』는 사건을 기록하였다. 『상서』와 『춘추』는 중국 고대시기의 양대 역사서이며,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제5장 - 『춘추』 

『춘추』는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오늘날의 전보처럼 매우 간단명료하여 문학작품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제6장 - 『논어』 

제자백가가 지은 산문은 수준이 대단히 높다. 제자백가에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공자이다. 『논어』는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고 사상적 가치는 두말 할 것도 없다.


제7장 - 중국 고대산문 

중국 고대산문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사史’로 불리는 산문의 시기이고, 두 번째 시기는 ‘자子’로 불리는 산문의 시기이다.


제8장 - 『초사』(상) 

『초사』는 한 권의 총집이지만 그중 굴원의 작품이 가장 많다. 굴원이 초나라 사람인 이상 『초사』의 발생지는 남방이며 한수漢水 유역이다.


제9장 - 『초사』(하) 

진실한 문학은 군중으로부터 나오기에 반드시 어느 한 지역의 민간에서 채집한다. 『초사』는 지역적인 성격을 지닌 동시에 문학적인 성격을 지닌 남방 문학이다.


제10장 - 부賦 

부는 운문과 산문의 결합체로, 서사를 할 때는 산문을 쓰고, 형용을 할 때는 운문을 쓴다. 이는 마치 선권宣卷에 설說과 창唱이 있고, 경극에 대사와 노래가 있는 것과 같다.


제11장 - 한부漢賦 

부는 훗날 황실의 소일거리 문학으로 변하여 주로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지어졌다. 즉 어용문학이 된 것이다. 사마상여가 지은 작품이 모두 이에 속하며, 굴원의 부와 더불어 양대 유파를 형성하였다.


제12장 - 한대 악부 

악부는 관청의 이름이다. 고대에는 시를 채집하는 관리가 있었고, 이들이 민간으로 나가 민가를 모아오면 악부에서 정리하였는데, 이렇게 나온 시를 ‘악부’라고 불렀다. 이는 마치 주나라 때의 국풍國風과 같다.


제13장 - 한대 산문: 『사기』 

‘당나라 시, 진나라 서예, 한나라 문장’을 으뜸으로 치는데, 한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산문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마천의 『사기』 말고는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제14장 - 한대 주의奏議·조령詔令(부서찰附書札) 

주의는 정치에 사용된 산문으로, 백성들이 어떤 의견이 있을 때 정부에 올린 문장이다. 조령은 정부가 백성에게 내린 것으로 간단한 몇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제15장 - 한대 오언시(상): 「소리하량증답시」 

모든 문학작품은 각종 체재마다 그 연원과 발전 과정이 모두 다르다. 이를 알지 못하면 문학을 이해할 수 없다. 즉 문학사를 잘 알려면 이에 대한 고증 또한 필요하다.


제16장 - 한대 오언시(하): 「고시십구수」 

「고시십구수」는 한 시대 한 사람이 지은 작품이 아니다. 그 당시에 쫓겨난 신하나 버림받은 여인, 나그네, 방탕한 여인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결코 명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단지 고향을 떠난 슬픔과 그리움을 토로할 뿐이다. 놀라운 표현이나 특출난 시어는 없지만 깊은 정감을 표현해냈다.


제17장 - 건안문학 

건안시대는 중국의 신문학시기이다. 이 시기의 정치는 암흑기라고 할 수 있지만, 문학은 오히려 획기적인 시기여서 찬양할 만하다.


제18장 - 문장의 체식體式 

문장의 체식은 다음의 세 가지 방면에서 논해야 할 것이다. 즉 문학의 내용, 문학의 대상, 문학의 도구와 기교가 그것이다.


제19장 - 『소명문선』 

제량시기에는 시문총집을 편찬하는 풍조가 대단히 성행했다. 시문총집을 편집한 학자와 문인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많은 선집들이 차츰 도태된 후, 『소명문선』은 당시 시문총집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제20장 - 당시(상): 초당시기 

위대한 문학은 대부분 태평성대에 만들어졌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문학은 단지 문학의 각성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뿐이고, 당대唐代에 이르러서야 정신과 기운이 충만하여 위진시기를 뛰어넘는 새로운 발전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제21장 - 당시(중): 성당시기 

시대의 기운이 방향을 틀면 반드시 많은 인재가 나오기 마련이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는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이백과 두보가 있고, 또 왕유도 있다.


제22장 - 당시(하): 중만당시기 

중당시기의 시인으로는 백거이와 한유가 대표적이다. 만당시기에 지명도가 있는 시인으로는 이상은과 온정균 등이 있다.


제23장 - 당대 고문(상) 

당대의 시와 문장을 연구하려면 『전당시』와 『전당문』을 참고하고, 당대 소설을 연구하려면 『태평광기』를 참고해야 한다.


제24장 - 당대 고문(하) 

당대의 고문가로는 한유와 유종원을 병칭한다. 한유는 고문과 복고를 제창했는데, 그의 가장 유력한 조력자로 유종원을 꼽을 수 있다.


제25장 - 송대 고문 

당송시기의 고문에서 한유와 구양수는 모두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구양수의 문학은 한유의 영향을 받았지만 두 사람의 풍격은 완전히 다르다. 한유 문장의 풍격이 강건하다면, 구양수의 문장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제26장 - 송사 

사는 송대에 특히 흥성하여 당대를 능가했다. 지금 사람들은 문학이란 진화하므로 새로운 문학이 나오면 구문학은 쇠퇴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송대에도 시는 여전히 존재했다. 단지 사라는 것이 새로 생겨 지파가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다.


제27장 - 원곡 

송사에서 원곡으로 바뀐 후 곡은 사회화되고 평민화되었다. 곡에서 다시 명대의 전기傳奇로 바뀐 후 곤곡이 생겼다.


제28장 - 소설과 희곡의 변천 

중국 고대에 고사와 신화, 소설 그리고 필기筆記 등이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코 문학이 아니었다. 엄격히 말해 문학사에 진입한 소설은 당대唐代에 비로소 나왔고, 『태평광기』가 대표적이다.


제29장 - 명청 고문 

명대의 귀유광 이후 청대에 이르러 당송팔대가를 숭상한 요내, 요내의 스승 유대괴, 유대괴의 스승 방포가 나왔다. 그들 삼대는 모두 귀유광을 학습하였고, 안휘 동성 출신이다. 당시는 고증학이 성행했지만 동성파는 문학을 제창하였다.


제30장 - 명청 장회소설 

후에 나온 중국 소설로는 『노잔유기』·『얼해화』·『유림외사』 등이 있지만, 이 작품들은 모두 『수호전』이나 『홍루몽』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제31장 - 결론 

문학사를 읽으려면 우선 문학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좋다.


후기後記 

부기附記 

후주後註 




본문에서


-예컨대 당나라 한유와 유종원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은 단순히 정치 배경만 논하는 것으로는 미흡하다. 한유의 문장이 팔대八代의 쇠미한 기풍을 떨치고 일어났다고 말하는 이상, 우리는 먼저 『소명문선昭明文選』을 읽고 난 다음 한유의 문장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 쉽게 그 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먼저 비교를 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학사를 배우려면 비교를 하는 것이 필수이다. 서양문학사를 배우고 싶으면 중국문학사와 비교해야 한다. 비교를 해야만 중국문학사의 독특한 면모를 알 수 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에는 아직 이상적이라 할 만한 문학사가 나오지 않았다. 우리 모두 찾고 또 창조할 때를 기다린다. (25~26쪽)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가장 늦게 시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으며, 마치 눈앞에 이러한 경치가 펼쳐진 듯하다. 이 말은 정말로 소나무와 측백나무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비比’, 즉 일종의 비유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환난에 처했을 때 비로소 친구의 우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할 수 있고, 이로부터 유추하여 발전시켜나가면 다른 것도 알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공자가 결코 엄숙한 얼굴로 도의道義나 철학만 말하는 게 아니라, 인생과 생활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는 『시경』을 읽으라고 권했던 것이다. 이 구절은 단지 열 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2500년 동안 전해져왔다. 이는 교훈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며, 한 수의 시이자 한 폭의 그림이다. 그래서 후인들이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릴 때 이것을 제재로 한 경우가 아주 많았다. 이른바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말은 바로 이 구절로부터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61~62쪽)


-중국 고대 역사문화의 최초 발원지는 지금의 하남, 산동, 섬서, 산서 일대로 지금의 황하 유역 일대이다. 그러나 초楚나라는 한수漢水 유역에 위치했고, 굴원이 초나라 사람인 이상 『초사』의 발생지는 중원中原이 아니라 남방이고, 황하 유역도 아니고 장강 유역도 아닌 한수 유역이라고 할 수 있다. (75쪽)


-문자는 죽은 것이고 지역은 살아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이 두 가지를 배합해서 말해야 한다. (……) 예컨대 남방은 기후가 좋아 집 밖에서 생활할 수 있고 다양한 춤이 있지만, 여러 신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고정된 체계가 없다. 북방의 춤은 체계적이고 신에 대한 공경 역시 통일되어 비교적 엄숙하지만, 판에 박은 듯 융통성이 없다. 남방은 물을 중시하여 수신水神이 있고, 북방은 산을 중시하여 산신山神을 공경한다. 남방은 굴원처럼 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면 수신에게 제사 지낼 때 반드시 제물을 물속에 던지지만, 북방은 산신에게 제사 지낼 때 불을 피워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한다. (……) 한나라 이후의 사람들은 굴원이 상강湘江 유역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에, 「구가」가 상강 유역을 배경으로 창작된 작품이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사실에 위배되는 것으로, 「구가」는 결코 상강의 동정호洞庭湖를 소재로 한 것이 아니다. 사실 『초사』 문학은 ‘이남二南’, 즉 양양과 남양에서 기원하였으니 그 창작 배경은 호북湖北이지 호남湖南이 아니다. 굴원 시대에 말하던 동정호와 상강은 모두 악鄂(호북을 간략히 부르는 말)에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지명이 옮겨갔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뿐이다. (81~82쪽)


-부는 훗날 황실의 소일거리 문학으로 변하여 주로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지어졌다. 즉 어용문학, 소일거리 문학이 되고 만 것이다. 사마상여가 지은 작품이 모두 이에 속하며, 굴원의 부와 더불어 양대 유파를 형성하였다. 이는 마치 당나라 때 속세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성詩聖 두보와 속세를 벗어난 시선詩仙 이백의 상황과 같다. 문학은 크게 속세를 벗어난 것과 속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두 파로 나눌 수 있지만, 세속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실용적인 문학이 더 훌륭하다. 두보의 시는 세속을 벗어나지 않고 실용적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장자보다 높다. 장자는 단지 철학가일 뿐이다. 도연명과 굴원을 비교하면, 도연명은 세속에서 멀어져 사회와 협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굴원과 두보는 중국문학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고, 장자와 도연명은 그들 다음이다. (95쪽)


-『사기』는 여러 방면에 속한 다양한 인물들을 묘사하였다. 또한 이 안에는 사마천의 감정이 들어가 있지만 결코 사적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사마천은 역사를 기술하는 재능도 있고, 역사적인 식견도 있으며, 아울러 문학에 대한 흥미와 역사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지혜도 있다. 그는 비록 유방보다 항우를 훨씬 좋아했지만, 유방을 성공하게 만든 장점과 항우을 실패하게 만든 단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섬세한 필법으로 인생을 묘사하면서도, 비판할 때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그쳤다. 즉 인물묘사는 지극히 자세하고, 비판은 대단히 간단명료하다. (110쪽)


-조조가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양현자명본지령」에서 공자가 『논어』에서 제나라 환공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주周나라를 섬긴 것을 칭찬하였듯이 자기 역시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이 없고, 주공周公이 형 무왕武王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지은 「금등金縢」을 보고 이 글을 지을 생각을 하였다고 했다. 또한 악의樂毅가 자신이 섬겼던 연燕나라를 조趙나라 왕이 치려 하자 눈물을 흘리며 멈출 것을 하소연한 일, 개지추介之推가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벼슬을 내리려 하자 면산綿山으로 은거한 일, 신포서申包胥가 진秦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 초楚나라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 공로가 있어 포상하려 했지만 거절한 일, 몽염蒙恬이 진秦나라에 대해 충성과 의리를 다한 일 등의 전고典故를 예로 들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조조의 문장을 읽으면 흥취가 흘러넘치는데, 이는 그가 전적典籍을 열심히 읽고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은 지식이나 교양이 없는 사람이 쓴 공허하고 무미건조한 글과 절대로 비교할 수 없다. (123쪽)

 

-이제 중국과 서양의 문학을 개괄적으로 비교해보고자 한다. 중국문학은 교훈적이고, 상층계급의 것이고, 정치적이고, 내향적이다. 또한 반드시 다른 사람이 이해해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예컨대 「양춘백설陽春白雪」같이 수준 높은 작품은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고 저급한 노래인 「하리파인下里巴人」 같은 노래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후세에 다시 양웅揚雄 같은 이가 나오면 반드시 좋아할 것이며, 백세百世 후에 성인이 나와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라는 태도를 지닌다. 중국문학은 계속해서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며 후세 사람들이 이를 발굴하여 감상하기를 기다린다. 수천 년 이전의 문장을 지금도 여전히 읽고 있다. (164~165쪽)


-최근 전목의 『사우잡억師友雜憶』을 다시 읽고, 그가 28세 때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0년 후 하문厦門의 집미학교集美學校로 옮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목은 고등부와 사범부 3학년 두 반의 국어를 담당했는데, 첫 수업에서 조조의 「술지령」을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학생들은 수업을 듣고 대단히 탄복했고, 교실 밖에서 몰래 듣던 교장 또한 대단히 만족하여, 이튿날 성대하게 연회석을 마련하고 그를 윗자리로 청해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술지령」은 『소명문선』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도 들어 있지 않다. 다행히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에 기록이 있어 마침내 전목이 관심을 가지고 첫 강의의 주제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 중국문학사를 연구하며 얻은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라고 생각했다. 또한 건안은 고금의 문체가 한 차례 큰 변화를 겪은 시기로 한나라 말기의 오언시를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산문의 체재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고, 조씨 삼부자는 문단의 영수로 큰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조조의 문학사 방면에서의 성취와 특수한 위치에 대해 근대 학자로는 전목이 가장 빨리 발견하였다. (193~194쪽)


-동한 말년에 이르러 사람들은 정치가 붕괴될 것을 예감하였는데, 이 시기의 문학은 오히려 훨씬 친근함이 느껴지고 진실한 감정이 들어 있다. 당시 조조는 이미 정치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일반 평민의 개인적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컨대 “술잔 들고 노래 부르노니, 인생이 얼마나 되는가? 아침 이슬처럼 순식간이건만, 지나가버린 날이 참으로 많구나”라고 노래한 그의 「단가행」은 일반 평민의 풍격이 잘 표현된 시이다. 이 시는 『시경』, 「이소」, 한부와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조조의 아들 조비와 조식은 아버지의 풍격을 계승하여, 문학이 정치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하였다.(218~219쪽)


-두보는 유년시기 산동山東과 강소江蘇 등지에 간 적이 있다. 그는 이백과 사이가 좋았다. 35세 때 장안에 가서 관직에 임용된 때부터 44세까지는 두보 일생 중 가장 불우하고 빈곤한 시기였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겪었지만, 이로 인해 좋은 작품을 많이 썼다. 두보 나이 44세 되던 해는 중국역사의 전환기였다. 48세에 두보는 사천四川에 갔고, 59세 되던 그해까지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현지의 정부 수장은 그를 외빈으로 대접해줬다. 이 시기 그의 시는 기교적으로 매우 발전하였지만, 시의 내용은 이전에 비해 많이 못해졌다. 그의 시를 읽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연보에 따라 읽는 것이다. 연보에 따라 시집을 읽으면 그의 전기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작가의 책을 읽든 연도의 순서에 따라 읽는 것이 가장 좋다. (274쪽)


-사실 나는 사람의 천부적 자질은 비슷하며,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소식은 송 인종 가우嘉祐 원년(1056), 21세의 나이로 진사에 합격했다. 당시 시험문제는 ‘상벌은 충후하게 시행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논하는(刑賞忠厚之至論)’ 것이었다. 소식은 아주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많은 책을 읽었으므로 광범하게 자료를 인용하여 증명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전고를 만들어내어 시험관인 구양수를 경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식은 본래 이 문장으로 일등을 할 수 있었는데, 구양수는 이 문장을 지은 수험생이 증공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기 위해 이등으로 내렸다. 구양수는 합격자 명단이 게시된 후에야 비로소 소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식이 만들어낸 전고는 『삼국지』 중 「공융전孔融傳」을 모방한 것으로, 이는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58~359쪽)


-5·4운동에서 백화문을 제창한 이후 문학이라 할 만한 작품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언어와 갑골문, 인물과 작품에 대한 고증만 강의하고 문학을 언급하지 않았다. 문학과 관련된 학과에서 들을 수 있는 수업은 단지 언어와 문자, 고증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으니, 30년이 지난 지금의 청년들은 국문 기초가 전혀 없다. (……) 내 친구 중에 호적胡適의 문장이 기발하고 생동감 있는데, 매우 신경을 써서 지은 문장이지 되는 대로 쓴 것이 아니다. 나는 호적의 이론에는 반대하지만, 그의 문장은 아주 훌륭하여 지금까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호적의 문장은 여전히 내용이 풍부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청년들의 국문 기초가 부족해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397쪽)


-김성탄은 또한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 유서를 한 통 남겼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들아 보아라. 땅콩과 말린 두부를 함께 먹으면 맛있는 닭고기가 된단다. 이 방법을 전하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그 관리는 웃으며 말했다. “선생께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남 좋은 일만 하시는군.” (428~4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