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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귀족은 2000년 점원보다 궁핍했다 <유럽문화사>

<유럽 문화사>

도널드 서순 지음·오숙은 외 옮김/전 5권·500∼672쪽·각권 2만8000원·뿌리와이파리

 

“이 책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사업으로서의 문화, 직업으로서의 문화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서술되는 문화 이야기는 시장을 위한 생산의 이야기다. 이것은 런던 지하철의 승객들, 다른 나라의 비슷한 이들, 또 지난 200년간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이들이 평생을 사는 동안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해온 일의 이야기다. 다만 그 영역을 그들이 읽는 것, 듣는 것, 보는 것으로 좁힐 뿐이다.”

 

런던대 퀸메리 칼리지에서 유럽 비교사를 강의하는 도널드 서순은 1645쪽(번역본은 전 5권 2790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 <유럽 문화사>(The Culture of the Europeans: From 1800 to the Present)가 담을 내용을 그렇게 정했다.

 

200년 전 런던 클래펌 역의 승객들 대부분은 읽거나 쓸 수 없었다. 학교교육은 의무가 아니었으며, 대학은 극소수 엘리트들만 다녔다. 1800년, 2200만의 독일 인구 가운데 독서 가능 인구는 약 30만명이었고, 1881~1900년의 프랑스 징집병 600만 중 책이나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3%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됐다. 유급휴가도 없었고, 사람들은 퇴직은 하지 않았으나 어차피 젊어서 죽었다. 대부분은 책 살 돈이 없었고, 도서대여점에서 빌릴 수도 없었다. 농민·노동자들은 거의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음악이래야 일요일 동네교회, 또는 1년에 고작 몇 번 열리는 축제, 장에서나 경험하는 게 전부였다. 300곡 가까운 바흐의 칸타타는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회중 정도만 들을 수 있었다. 간혹 민요와 싸구려 소설이나 발라드가 있었지만 독서의 즐거움은 대체로 중간계급과 그 하인들에 한정돼 있었다.

 

당시 가장 부유했던 대영제국에서도 중간계층 폭은 아주 좁았다. 물론 특권은 귀족이 더 많이 누렸다. 그들은 연주회·쇼를 즐기고 책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1800년에는 제아무리 귀족이라도 200년 뒤의 평범한 상점 점원보다 문화적으로 궁핍했다.

 

2000년 12월 런던 사우스클래펌 지하철역에서 서순이 목격한 수많은 승객들은 대부분 일간지나 잡지, 책을 보거나 시를 읽고 있었고 시디(CD)나 카세트를 들었으며, 닌텐도 게임보이나 십자말풀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늘날 바흐 음악을 듣는 사람들 수는 20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늘었다. 전자혁명과 함께 많은 책들이 ‘책의 죽음’을 예언했지만, 인터넷 시대에도 책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히려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더 많이 팔리며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계수치들은 보여준다. 더 많이 읽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럽 문화사>는 그 200년 사이 유럽인들, 그 중에서도 다수 대중의 삶에 일어난 이런 엄청난 변화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주로 “읽는 것, 듣는 것, 보는 것”들의 역사를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보여준다. 거기에는 소설, 동화, 논픽션, 그 작가들, 신문, 잡지, 만화, 출판, 사진, 연극, 극장, 연주회장, 클럽, 와인바, 오페라, 뮤지컬, 카바레, 악기, 악보, 녹음, 축음기, 팝 음악, 영화, 다큐멘터리,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등이 포함된다. 미술품은 복제 가능한 포스터, 모조품, 책 속의 미술작품, 희귀하지 않은 판화 등 현대미술 시장에서 배제되는 것만으로 한정했다. 여기서도 소수 엘리트보다는 다수 대중의 문화를 중심에 놓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서순은 이들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해온 일”들이 (전쟁과 평화, 생존문제에 비해) 하찮아 보일지라도 바로 그 하찮은 것을 추구하는 데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특징이라며 “고급문화든 저급문화든, 톨스토이든 <그랜드 세프트오토>(전자게임)든 문화가 없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보다 훨씬 야만적인 세상”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문화사’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이 책은 사회문화사나 철학·미학적 관점의 예술사가 아니다.

 

서순은 문화를,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한다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돈을 매개로 시장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 거래되며 소비되는 문화. 이 사업으로서의 문화는 유럽에서 영국·프랑스·독일 등 핵심 국가들이 등장하고 책이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유통될 수 있는 독서인구, 인쇄·출판업자, 도서시장이 나타나고 연주회장과 악보, 작곡가, 오페라 가수들, 극작가, 배우, 신문 등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때부터 본궤도에 오른다. 서순은 그런 사회·경제적 변화가 시작된 1800년 무렵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럽’엔 미국과 러시아도 포함되며, 지금 그 유럽 200년의 문화축적이 만들어낸 강력한 자장 속에 포섭된 한국도 언어 및 인쇄술과 관련해 몇 차례 언급된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의 역사>(해냄, 2003)에서도 서순은 그림 자체의 철학·미학적 분석에 주력하는 게 아니라 그 그림이 그토록 유명해지게 된 경위와 그 사회적 배경에 주목했다. 그는 <사회주의 100년-20세기 서유럽의 좌파>라는 1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도 썼다.

 

<유럽 문화사>는 본문만 4부 62개의 장으로 짜였고, 여기에 200쪽 가까운 주석과 참고문헌이 붙고, 원서엔 없는 도판 553컷도 추가됐다.

 

4인 공역자를 대표한 오숙은씨는 “(유럽) 문화시장의 형성과 확장, 시장의 패권과 그 이동, 문화상품의 성공과 실패 요인들을 탐색하는 것이 이 책의 얼개”라고 요약했다. 그리고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을 세세한 내용들”과 그것을 뒷받침한 방대한 자료들에 감탄하면서, 새로운 대중문화의 등장을 우려하는 도덕주의자나 엘리트들 얘기에 냉소를 보내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서순의 글이 “유쾌하고 재미있다”고 평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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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2년 7월28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서평입니다.

기사 원문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446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