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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김철 지음|147*215mm|272쪽|2018년 12월 10일 펴냄|16,000원



똥, 오줌, 고름, 피, 토사물…

이 더러운 것들을 통해 나를, 그리고 한국 사회를 본다는 것은



『토지』의 뻐드렁니, 김수영의 「시작 노트」

일본인은 “게다짝 신고 안짱걸음 걸으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 살피듯 땅을 보고 걷”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속바지를 안 입”으며, “용모에는 뻐드렁니가 꽤나 많”다. 6800쪽이 넘는 대하소설 『토지』의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악당, 일본 경찰의 밀정 김두수 역시 뚱뚱하고 못생겼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뻐드렁니’(!)를 가졌다.


『토지』는 선(인)/악(인)의 선명하고도 가차 없는 이분법으로 엮는 민족-멜로드라마다. 궁극의 승리를 향해 가는 선(인)의 총칭은 ‘민족’이고, 출발점이자 회귀점인 ‘민족’은 이 멜로드라마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그리고 일본(인)과 친일파는 “악의 뿌리”이자 “절대악”이다. 


『토지』에서, 일본에는 종교도, 사상도, 철학도, 문화도, 예술도 없다. 일본의 문화나 예술은 저속하고 빈곤하며 상스럽고 조잡하다. 있는 것은 칼과 섹스뿐이다. 일본인은 ‘짐승’, ‘야만인’이다. ‘조선 사람은 아무리 막돼먹었어도 삼강오륜이 몸에 밴 점잖은 양반’인 데에 비해 ‘왜놈은 더럽고 상스러운 야만인, 짐승’인 것이다. 이런 일본(인)론, 일본문화론은 저마다 다른 인물의 입에서, 심지어는 “만주에서 일본 군부의 덕을 보고 사는” “우익 대륙낭인” 무라카미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난폭한 인종주의적 편견은 본디 제국주의/일본의 것이 아니었던가. 말할 것도 없이, 제국주의를 넘어설 상상력 역시 이 안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김수영은 1966년 2월 한 문학잡지에 이런  「시작 노트」를 발표했다. “(…) 그대는 기껏 내가 일본어로 쓰는 것을 비방할 것이다. 친일파라고, 저널리즘의 적이라고. (…) 하여튼 나는 해방 후 20년 만에 비로소 번역의 수고를 덜은 문장을 쓸 수 있었다. 독자여, 나의 휴식을 용서하라.”


겹으로 충격적이다. 첫째, 글 전체가 일본어로 쓰여졌다. 한국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김수영이 해방 20년 후에 의도적으로 일본어로 글을 써서 한국 독자들에게 발표한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잡지에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실렸다. 작가가 일부러 일본어로 써서 보낸 원고를 잡지의 편집자가 마음대로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한 것이다. 결국, 일본어 원문은 사라졌고 김수영의 의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한국문학사상 전무후무한(것이 될 뻔했던) 이 사건의 ‘사건성’은 이렇게 ‘사산’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식민지와 해방 이후를 관통하는 한국 사회의 어떤 뿌리 깊은 정신구조, 혹은 현대 한국인의 어떤 정치적 무의식의 전형이 깔려 있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국 근대문학을 통해 식민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 문제를 천착해온 지은이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루쉰을 논하며 “구원하지 않는 것이 노예에게는 구원”이라고 말한 대목을 지팡이로 삼는다. 우리가 노예였던 시절, 한글과 조선어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그때는 그때고, 민족적 순수성-연속성의 신화 속에서 우리는 깨끗한가 

“新春을 맞이하옵시어 天皇, 皇后 兩陛下께옵서 御機嫌이 御麗하옵시고” “皇軍의 威武와 國家 興隆의 氣運 더하여지기를 祈願하옵나이다.” 『한글』 1939년 1월호 머리글, 「謹奉賀新年」이다. 1938년 이후 조선어학회는 이 기관지 매년 1월호에 「신년봉축사」를 실었고, 「국민정신총동원 ‘총후보국강조주간’에 대하여」, 「제36회 해군기념일을 맞음」 같은 글로 노골적인 전쟁협력행위를 했다. 그때는 그랬다. 


문제는 『한글』이 이런 내용을 실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 내용이 해방 이후에 나온 『한글』 영인본에서는 모두 삭제되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조선어학회를 이어받은 한글학회는 1972년에 󰡔한글학회 50년사󰡕를 간행하면서 그 머리말에 이렇게 쓴다. “따라서, 한글학회의 역사는 일제에 대한 무기 없는 투쟁이었다.” 필요 없는 것들은 다 뺐다. 그런데, 그 ‘필요’는 무슨 필요였을까.


어느 여학생의 일기장에 적힌 “국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라는 문장이 빌미가 되었던 ‘조선어학회 사건’(1942)도, 살피자면 길고도 깊다. 1938년부터 조선어는 존재 자체를 위협받았다. 조선어는 식민지의 상징적 질서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일본어=국어가 대체해야 했다. 이 사건은 조선어≠국어라는 기표를 가지고 식민자와 피식민자가 환상의 무대에서 펼친 가장 극적인 드라마였다. 


사건의 발단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고, 해석 또한 엇갈린다. 일기장에 적힌 ‘국어’는 일본어였는가, 조선어였는가. 그것을 사건화한 형사는 일본인이었는가, 조선인이었는가. 그런데 식민주체와 민족주체의 무의식과 식민지의 사회적 현실이 뒤엉킨 이 드라마 최대의 아이러니는, 법정과 판결문에서 나타난다.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통일·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문화적 민족운동임과 동시에 심모원려를 품은 민족독립운동의 점진형태”라고 식민지 사법권력이 주장하고, 피고인 측은 ‘조선어로 정치, 경제, 과학, 사회 등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어는 민족정신이나 민족발전 및 독립운동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선어문운동에는 그럴 능력이 없으며 우리 역시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고 변론한다. 


이것은 환상 게임이다.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욕망은 서로 전도된 채 표출된다. 그리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작동하는 이 현장에서, 노예=피식민자는 ‘해방에의 꿈’을 포기했다고 선언하고, 노예의 환상이 없으면 주인의 환상도 없기에, 식민권력은 노예가 지녀야 할 해방에의 꿈을 거듭거듭 일러준다. 


하지만 ‘일제시대’라고 타자를 치면 한글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일제강점기’로 바꾸어버리는 2019년의 한국 사회에는 ‘식민지 시대’가, 그 시절의 2000만 조선인의 총체적인 삶과 일상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교전상태에서의 적에 의한 일시적인 점령으로 이해하는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는 식민지의 기억을 민족적 순수성, 연속성의 신화 속에 봉인하고, 궁극적으로는 식민지의 치욕과 굴종의 기억을 깨끗이 ‘청산’, 즉 ‘망각’하고자 하는 한국 사회의 오랜 욕망을 반영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식민지를 살았던 수천만 명의 삶을 특정한 목적에 맞추어 재단하는 타자화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지닌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욕망,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초라한 욕망의 단적인 표현이다. 


삼팔선은 빨갱이가 지키고, 동해는 친일파가 지킨다

근대 국민국가는 새로운 질병, 자기동일성=정체성에 대한 편집증적 강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은 한국에서의 근대 정체성-정치의 수원지일 뿐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진행되는 폭력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 정체성 회복이니 정립이니 하는 허구적 정언명령은 식민지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끝없이 반복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통해 새로운 폭력의 연료를 공급받고 정당성을 확보한다. 지은이는 근대 국민국가의 정체성-정치가 필연적으로 낳기 마련인 잉여적 존재들, 즉 난민적 상태의 ‘비천한 육체들’(卑體, 앱젝트abject)에 주목한다. 


통치의 주체subject도 대상object도 아닌 앱젝트는 근대 정체성-정치의 메커니즘 속에서 “기본권 박탈이 아니라 아무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 체제의 부분이 아니라 체제의 배설물, 토사물로 존재한다. 배설하지 않으면 유기체로서의 체제는 존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앱젝트는 체제의 필연적 산물이며 필수적 존재다. 


앱젝트는 내 몸에서 나온 오물들, 똥, 오줌, 피, 땀, 고름, 토사물 같은 것이다. 역겹고 구역질나는 이 앱젝트야말로 내 존재의 한계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내 육체는 그 오물들이 쏟아지는 지점까지만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계선의 저쪽은 시체다. 앱젝트는 “정체성을, 체제를, 질서를 교란하는” 불순하고 위험한 존재들이다. 이들을 밀어내지 않는 한, 나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법과 질서는 위험에 처한다. 근대 국민국가는 이 비천한 육체들, 이 비체들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딛고 서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이념의 금기(=성역)를 표시하고 그에 따라 국민적 동질성을 구축해온 것은 ‘빨갱이’였고, 나이, 신분, 직업, 지역, 정치적 입장 등에 따른 모든 차이와 갈등을 한순간에 해소하면서 ‘한민족’으로서의 집단적 동질성을 확립해온 것은 일본과 ‘친일파’였다. 참으로, 삼팔선은 빨갱이가 지키고, 동해는 친일파가 지킨다. 



비천한 육체들은 말할 수 있는가?

지은이는 묻는다. 내 안에 있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는/보고 싶지 않은 이 비천한 육체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누구인가? 나는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가? 일제 식민지에서 종군위안부와 강제노동의 주요 동원 대상이 되었던, 인구의 80% 이상을 점하는 농민과 문맹자와 빈민들, 그 밖에 일상적 범죄자, 매춘부, 정신병자, 장애인….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던 이들은 정체성-정치의 상상력, 즉 역사 서술의 목표를 ‘국가의 신체’와 국민적 정체성의 확립에 두는 국사-민족사의 시야, 혹은 식민지의 삶을 오직 영웅적 독립투사와 비열한 친일파의 대립으로만 그리는 멜로드라마의 편집증적 시각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해방 이후, 미군 기지촌의 ‘위안부’ ‘양공주’, ‘혼혈아’, 간첩조작 사건의 ‘간첩’, ‘광주대단지’의 ‘폭도’, ‘막걸리반공법’의 ‘빨갱이’, 삼청교육대의 ‘부랑배’, 수용소의 장애인과 부랑자, 매춘부, 탈영병, 성소수자, 외국인노동자, 불법체류자, 난민…. 이들의 비천한 육체 역시 ‘국가의 신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이 비/존재의 비루한 신체=‘국민국가의 오물’을 드러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할 것인가? 그들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을 재현하면서 자신을 투명한 존재로 재현하는 지식인’의 자기모순은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나아가, ‘그리는 자’와 ‘그려지는 자’ 사이의 회복할 수 없는 분열 상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끝내 발표하지 못한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와 ‘한국학’-‘한국문학’의 난관들, 그리고 소설 『토지』의 일본(인)관을 다룬 글로 먼저 눈을 크게 뜬다면, 답을 함께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타자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정체성의 강박에서 벗어날 가능성의 첫 단서이므로.   




지은이 소개


지은이 김철은 연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교원대와 연세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있다. 주로 한국 근대문학을 통해 식민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 문제를 분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저서로 『‘국문학’을 넘어서』, 『‘국민’이라는 노예―한국문학의 기억과 망각』, 『복화술사들―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 『식민지를 안고서』, 『바로잡은 무정』,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공편), 『저항과 절망―식민지 조선의 기억을 묻다』(일본어) 등이, 역서로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 『조선인 강제연행』 등이 있다. 




차례


머리말: 비천한 육체의 농담


민족-멜로드라마의 악역들―󰡔토지󰡕의 일본(인)

비천한 육체들은 어떻게 응수應酬하는가―산란散亂하는 제국의 인종학

‘국어’의 정신분석―조선어학회 사건과 『자유부인』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일제 청산’과 김수영의 저항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오지 않은 ‘전후戰後’

자기를 지우면서 움직이기―‘한국학’의 난관들

‘위안부’, 그리고 또 ‘위안부’

저항과 절망―주체 없는 주체를 향하여

제국류類의 탄생

천지도처유아사天地到處有我師―『복화술사들』그 전후前後

제국의 구멍―『조선인 강제연행』의 번역에 부쳐

     

출전




본문에서


프란츠 파농은 식민 종주국인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피식민지 모로코 출신의 흑인 남성 엘리트들이 프랑스 영토에 첫발을 딛자마자 하는 일이 백인 창녀를 ‘정복’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피식민자에게 내면화된 식민주의적 의식과 그 분열을 분석한 바 있거니와, 누이동생이 ‘지배민족’과 연애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저 ‘오빠’의 내면이야말로 실로 문제적이다. (…) 피식민지 남성에게 주어지는 이 ‘거세’의 감각이야말로, 식민주의의 모방의 결과이며 또 계속해서 그를 식민주의의 모방자로 만드는 심리적 동력이다. 그러므로 ‘정복자의 여자’를 ‘정복’함으로써 거세된 자신의 남성성을 되찾고자 하는 피식민지의 남성이야말로 식민주의를 충실하게 학습한 영원한 노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46쪽) 


누이동생이 일본인과 연애한다는 사실에 대해 치욕감을 느끼는 ‘오빠’ 유인성은 왜 조선 남자가 일본 여자와 관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치욕감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정복자의 여자’를 ‘정복’한 ‘피정복자 남성’의 쾌감이 이 남성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의 여자가 정복자의 남성과 관계하는 것에 대해 이 남성들은 심한 무력감과 분노를 느낀다. 이 분노와 무력감을 그들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여성 신체에 대한 훼손으로 표상하고, 그렇게 훼손된 여성 신체를 말소시킴으로써(“자결”) 상처로부터의 회복을 기도하는 난폭한 가부장주의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복과 언제나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유인성은 그러한 피식민지 남성의 심리를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누가 뭐래도 인실은 조선의 딸이고 조선의 잔다르크야”라고 말할 때, 그는 참을 수 없는 치욕감을 누이를 화형(잔다르크)시킴으로써 해결하는 것이다.(46-47쪽) 


문법학자 역시 법을 말한다. 오선영에게 있어 문법학자인 남편은 그녀의 주권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종일관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그 한 사람뿐이다. 아내의 일탈을 의심하는 한편 그는 “미군부대의 타이피스트” 박은미와 아슬아슬한 “밀회”를 즐기고 있다. (…) 그는 아내의 일탈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자, 다시 말해, 아내의 죄를 응징할 것인지, 용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입법자, 사면권자이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예외’로 규정할 수 있는 주권자인 것이다. 그가 문법학자의 형상을 지닌 것은 그러므로 필연적이다.(128쪽) 


마지막으로, 민족 혹은 국민으로 회수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민족-국가의 과거에 대해 말하고 책임을 물을 것인가, 또는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간단히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얼핏 보면 자신이 속한 민족-국가의 과거에 대해 그 구성원으로서, 즉 민족 혹은 국민으로서 말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민족-국가가 저질렀던 폭력에 대한 본질적인 책임추궁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폭력의 주체를 다시 강화하고 거기에 의지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민족 혹은 국민 주체의 입장에서 과거와 대면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그 강력하게 동질화된 집단주체의 환상을 통해 폭력의 실체를 가리는 것, 즉 일종의 책임 회피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215쪽)


해방 이전의 부모세대가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새겨진 식민지에 대해 시치미를 떼는 것으로 식민지의 기억을 묻어버렸다면, 해방 이후의 자식세대는 ‘굳이 시치미를 뗄 필요도 없이’ 식민지와 절연하고 망각했다. (…) 식민주의의 가장 큰 죄악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식민주의는 그 지배를 받은 자와 그 후손들로 하여금 식민지적 틀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상상을 원천적으로 박탈함으로써 그 지배를 영속화한다. 그 전형적인 예가 식민지의 역사를 일제에 대한 저항이냐, 협력이냐 라는 따위의 저열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멜로드라마적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일체의 언설이다. 그런 류의 폭력적 언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지적・문화적 산물들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행사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나는 끊임없이 절망했고, 지금도 그렇다. 나의 보잘것없는 글쓰기는 그 절망과 싸워온 흔적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러나 싸움에서 패한 것도 언제나 내 쪽이었다.(237-238쪽)


식민지에서의 근대적 지식 생산이 식민 종주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움켜쥔 그 ‘해방’과 ‘저항’의 도구가 실은 ‘적’의 것이라는 현실에 의해 식민지 민족주의의 운명은 언제나 극심한 모순과 분열의 위험 앞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을 직시해야만 피식민자의 진정한 해방은 열릴 수 있다는 점이다. 비유컨대, 그것은 칼자루가 아니라 칼날을 잡고 적과 싸우는 형국인 것이다. 어떻게 자신을 베지 않고 상대방을 넘어설 것인가? 피식민자의 이른바 ‘흉내’가 식민자를 전복하고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는 길은 적어도 이 이중성에 대한 자각, 이 모순에 대한 뼈를 깎는 자기 성찰 없이는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240-241쪽)